“땀의 가치·봉사·나눔 강조한 一家 정신 바로 지금 절실”

[논설위원의 이슈&톡] 연세대 총장 역임 김한중 일가재단 이사장 인터뷰

지난 6월 일가재단 이사장에 취임한 김한중 전 연세대 총장은 “한국 사회와 한국인들에게 좌표가 될 일가 김용기 장로의 가르침이 너무 소홀히 취급받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최현규 기자

김한중(72) 전 연세대 총장은 2012년부터 차그룹(옛 차병원그룹)에 몸담고 있다. 직함은 미래전략위원회 회장. 의료·교육인에 이어 기업인으로 제2의 인생을 사는 셈이다. 지난 6월에는 일가재단 이사장에 취임했다. 일가재단은 가나안농군학교로 유명한 고 일가(一家) 김용기 장로의 정신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1989년 설립된 공익재단법인이다. 김 이사장은 한국 사회와 한국인들에게 좌표와 등불이 될 수 있는 일가의 삶과 가르침이 너무 소홀히 취급되는 듯해 안타깝다고 했다.

-이사장이 보는 일가 김용기 장로는 어떤 분인가.

“무엇보다 큰 꿈을 꾸신 분이다. 개인의 영달과 안녕을 추구한 게 아니라 나라와 사회구성원 모두를 위한 꿈이라는 점에서 큰 꿈이다. 꿈의 바탕엔 기독교 정신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 농촌운동을 할 때는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는 민족 구원의 꿈을 꿨다. 광복 이후 6·25전쟁을 겪은 뒤로는 수천년 묵은 가난에서의 탈피가 꿈이었다. 또 우리 민족에게 부족했던 실질과 실용의 중요성을 일깨운 정신계몽가라고 생각한다. 안동 김씨 집성촌이었던 고향에서 일가는 어린 시절 한학을 배웠다. 이 마을에서 가장 먼저 기독교를 받아들인 부친의 영향으로 일가는 유교와 기독교의 가치를 같이 공부하게 됐다. 당시 유교의 허례와 허식에 대한 반성이 평생 실질과 실천을 강조하는 바탕이 됐다.”

-김용기 장로 하면 가나안농군학교만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일가의 가르침이 가난했던 1960, 70년대에나 유효한 게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일가 선생의 사상이 복민주의인데, 여기서 복민(福民)은 하나님의 복 받은 백성이라는 뜻이다. 복민주의에는 정신생활의 빈곤과 경제생활의 궁핍을 모두 극복하려는 일가의 뜻이 담겨 있다. 그 실천 강령이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흙사랑이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가나안농군학교의 구호와 관련 있는 게 흙사랑이다. 당시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게 식량 증산이어서 흙사랑으로 표현됐지만, 21세기에도 여전히 긴요한 가치가 담겨 있다. 땀의 정직함, 직분에의 충실, 성실 등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은 배곯는 사람을 보기 어려울 뿐 아니라 과체중과 비만이 사회 문제가 됐다. 하지만 땀의 가치를 잊어버린다면 이런 풍요가 지속될지 의문이다. 일가가 강조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는 봉사와 희생, 나눔의 정신이 담겨 있다. 이런 정신을 잊어버리면 어떤 사회든 공동체든 건강할 수 없다. 일가의 가르침은 시대와 지역을 뛰어넘는 보편성이 있다.”

-가나안농군학교에서는 치약도 한번에 몇 ㎜만 써야 할 정도로 근검절약을 강조했다고 한다.

“지금 젊은이들은 상상하기도 힘들겠지만, 당시에는 물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지금은 소비가 미덕이라고 하지만, 지구생태계가 한계에 달한 게 분명해진 것도 사실이다. 환경이 버텨낼 수 없는 과소비와 무절제가 지속될 수 없다. 일가가 강조한 근검절약은 전 지구적 환경 위기 시대에 다시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

-차그룹의 주력 업종은 차바이오텍 등 바이오산업이다. 한국 바이오산업의 현재와 미래를 어떻게 보나.

“4차 산업혁명은 정보기술(IT) 혁명의 가속화에다 융합이 더해진 것이다. 여기서 융합이 뭐냐면 IT와 바이오기술(BT) 간, 혹은 여기에 또 다른 혁신이 가세해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기술로 거듭나는 것이다. IT 이후 차세대 주력 사업을 일찍부터 찾았던 삼성그룹은 복제약을 만드는 삼성바이오로직스와 신약을 만드는 에피스로 바이오산업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제가 몸담고 있는 차그룹은 세포의 생물학적 특성을 변화시켜서 치료, 진단, 예방에 쓰이는 세포치료제 생산에 강점이 있다. 윤리적 문제가 있을 수 있는 배아줄기세포 대신 성체줄기세포를 이용하고 있지만 역시 규제가 문제다. 세포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민감한 문제라는 걸 알지만 일본에 비해서도 규제가 너무 강하다. 바이오산업의 규제를 좀 현실화할 필요가 있다.”

-차그룹 본사는 판교에 있다. 이사장에게 판교는 어떤 곳인가.

“판교는 미국 실리콘밸리 같은 기술 클러스터(cluster), 혁신도시를 지향했는데,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린 것 같다. 카카오 네이버 등 IT 기업의 본사뿐 아니라 최근에는 제조기업들도 본사나 연구개발센터를 이곳으로 옮기고 있다. 특히 시내 곳곳에서 자율주행차, 공유 전동킥보드·바이크 등 다양한 모빌리티 실험이 진행되고 있는 게 인상적이다. 몇 년 후에 보편화될 기술과 미래 도시를 먼저 볼 수 있는 곳이 판교라고 생각한다. 판교의 사례가 지방의 위기 해결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본다. 개인적으로 많은 자극을 받고 있다.”

-2008~2011년 연세대 총장을 역임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비대면 강의가 장기화하면서 대학이 위기에 처했다는 진단이 나오고 있다.

“큰 변화가 불가피할 것이다. 코로나19가 방아쇠를 당긴 건 맞지만, 그전부터 온라인 강의 등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커지고 있었다. 대학 바깥의 이러한 변화 요구에 대학 내부의 대응이 미온적인 측면이 있다. 교수 등 대학 구성원들이 이런 변화를 수용해야겠다는 결심을 하는 게 중요하다. 정부도 사립대 등 대학의 자율을 존중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대학 재정이 지금처럼 여력이 없으면 1급 인공지능(AI) 전문가 등을 해외에서 초빙해 수준 높은 지식을 창출하기는 불가능하다. 대학의 자율성과 다양성이 있어야 사회도 발전하고 국가 경쟁력도 높아진다.”

-코로나19로 청년들의 불안과 좌절감이 깊어지고 있다. 이들에게 조언한다면.

“청년들이 취업난을 겪는 데는 한국 경제가 추세적으로 저성장기에 들어간 탓도 있고, 일시적 요인 탓도 있다. 청년 세대의 어려움에 마음의 빚이 있다. 코로나19가 얼마나 지속될지도 예측하기 어려운 때에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조언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경험이 많다는 걸 내세워 이런 얘기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처럼 불확실성이 극대화된 때에는 한쪽 방향에 모든 걸 다 걸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코로나 지속 기간뿐 아니라 코로나 이후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도 불확실하다. 지금과 크게 다른 세상이 올 수 있지만 현재와 그리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여러 가능성을 열어놓는 개방적이고 유연한 자세와 시각을 갖는 게 일단 중요할 것 같다.”

일가 김용기 장로 누구
농촌운동 투신… 1954년 가나안농군학교 세워

일가 김용기(사진) 장로는 다산 정약용 선생 생가와 묘소가 멀지 않은 경기도 양주군(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봉안마을에서 1908년 태어났다. 몽양 여운형 선생이 고향인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에 설립한 근대 교육기관이었던 광동학교에서 공부했다. 일찍부터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둔 이상촌 건설에 뜻을 두고 농촌운동에 투신했다. 1940년 고향에 봉안 이상촌(理想村)을 건설했다. 이상촌은 일제 말기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을 거부해 요시찰 지역이 됐고 일가도 큰 고초를 겪었다.

6·25전쟁 직후인 1954년 경기도 하남시(당시 광주군)에 야산 1만3000여평을 매입해 가족·친지 등 28명과 함께 개간했다. 가나안농군학교의 전신인 가나안농장이다. 5·16쿠데타 직후인 1961년 6월 2일 당시 국가재건회의 의장이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했다. 박 대통령이 가나안농군학교에 감명을 받고 이듬해부터 새마을운동을 시작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1966년 막사이사이상 복지부문 상을, 1973년 초대 인촌문화상을 받았다.

배병우 논설위원 bwb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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