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일본어 강제해도… 교회는 한글 쓰며 지켜냈다

한글 말살 정책에 저항한 기독교

일제강점기 평양 남산현교회에 모인 신자들의 모습. 남성과 여성 교인이 나눠 앉은 모습이 눈길을 끈다. 국민일보DB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뒤 한반도에서 민족문화 말살 정책을 펼쳤다. 한글 사용 금지가 핵심이었다. 일제의 강압적 조치 속에서도 한글을 사용한 공간이 있었다. 바로 교회였다.

조선총독부는 38년 4월 발표한 제4차 조선교육령을 통해 한글 사용을 완전히 금지했다. 학교에서는 일본어 사용이 의무화됐고 한글 과목도 폐지됐다. 논문 작성도 일본어로만 해야 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적지 않은 교인들이 한글성경을 사용했다. 목회자는 우리말로 설교했다. 38년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는 아픔이 있었지만, 예배만큼은 우리말로 드리기 위해 노력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등 주요 교단 총회와 노회 회의록도 41년까지는 우리말로 기록했다.

42년부터는 우리나라 교단이 일본기독교단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이듬해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과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이 창립되고 45년 7월에는 모든 교단이 통합해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이 된다. 42년부터 교회의 공식문서에 일본어가 등장한 이유다.

조선예수교장로회가 1940년 9월 6일 평양 창동교회에서 열었던 제29회 총회 회의록이 한글과 한자 병기로 기록돼 있다. 국민일보DB

교회가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한글을 사용하려 했던 이유는 뭘까. 선교사들이 이 땅에 들어오자마자 한 일이 한글성경 번역과 사전 편찬, 문법 연구였을 정도로 한국교회와 한글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교회사학자들은 “한글을 사용하겠다는 의지가 누구보다 컸다”면서 “신앙을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도 한글은 중요했다”고 말했다.

이덕주 전 감리교신학대 교수는 8일 국민일보와 통화에서 “일제는 1910년 병합 이후 한글 사용을 억압했고 3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더욱 극렬하게 한글을 뿌리 뽑으려 했다”면서 “교회와 신학교에서만 끈질기게 한글을 사용했는데 이는 한글이 명맥을 유지하는 데 일조했다”고 말했다. 그는 “세종대왕이 한글을 반포한 1446년 이후 수백 년 동안 빛을 보지 못한 한글이 되살아난 건 선교사들에 의해 한글성경이 번역되고 배포된 게 계기였다”면서 “한글 확산에 교회의 공이 컸다”고 설명했다.

이치만 장로회신학대 교수는 교회의 한글 고수는 신앙을 지키려는 방편이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우리나라 기독교는 성경을 일점일획도 바꿀 수 없다는 성경 무오설에 뿌리를 두고 있었을 정도로 보수적이었다”면서 “이처럼 한 글자, 한 글자가 중요한 성경을 일본어로 읽는다는 걸 당시 기독교인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종교와 언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데 일제강점기 기독교인들도 신앙을 감싸고 있는 한글을 버릴 수 없었을 것”이라면서 “일제는 1911년 105인 사건을 시작으로 교회를 쉬지 않고 괴롭히고 핍박했는데도 교회가 한글을 버리지 않았던 건 결국 신앙을 지키려던 열정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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