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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는 시대다] 시련 이겨낸 여왕 vs 왕을 거느린 여걸… 여성, 영웅이 되다

<9> 선덕여왕

2009년에 방송된 ‘선덕여왕’의 최고 시청률은 43%에 육박했다. 예상을 뛰어넘는 성공이었는데, 사료도 충분치 않은 신라 시대 배경의 사극인 데다 여성이 왕이 되는 이야기가 대중의 사랑을 받을지 알 수 없었다. 불확실성은 장점이 됐다. 기존 사극에서 다룬 적 없는 호방한 이야기를 고증에 얽매이지 않고 전개할 수 있는 데다, 후궁들의 암투극에서 벗어난 여성 영웅의 성장기를 그리면서 젠더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줬다.

2009년 MBC 드라마 ‘선덕여왕’은 최고 시청률 43%에 육박할 만큼 국민적 인기를 얻었다. 선덕여왕이 되는 덕만(이요원)과 미실(고현정)의 권력투쟁을 그린 이 드라마는 후궁들의 암투극에서 벗어나 여성 영웅의 성장기를 그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MBC 제공

두 여성 영웅

드라마는 훗날 선덕여왕이 되는 덕만공주(이요원)와 미실(고현정)의 권력투쟁을 그린다. 진평왕의 딸 덕만은 ‘쌍둥이가 태어나면 성골 남자들의 씨가 마른다’는 저주 탓에 신생아 때 버려진다. 흔히 선덕여왕의 왕위계승을 성골만 왕이 될 수 있었던 골품제의 수혜 때문이지, 여권이 높았기 때문은 아니었다며 젠더적 의미를 축소하곤 한다. 그러나 드라마는 오히려 덕만이 태생으로 인해 고난을 겪는 것으로 그린다. 특히 성골 남자의 씨를 마르게 한다는 이유로 버려진다는 설정은 한국 여성들이 경험했던 여아 낙태나 기센 여자가 남자 형제의 앞길을 막는다는 식의 저주를 떠올리게 한다.

덕만은 중앙아시아 사막에서 국제 상단을 상대하며 자라다 출생의 비밀을 알기 위해 신라로 돌아온다. 이러한 설정은 영웅 서사에 걸맞은 스케일을 보여주며, 신라라는 시공간이 자칫 갑갑하게 느껴질 시청자들에게 드넓은 시야를 틔워준다. 남장 차림으로 신라에 온 덕만은 김유신의 낭도가 되어 백제와의 전투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다. 이런 고생은 보통 공주로서 상상하기 힘든 경험이지만, 장차 왕이 될 영웅의 성장기로는 필수적이다. 온갖 고초 끝에 자신의 신분을 알게 된 덕만은 자기 존재를 입증해내고 조정과 백성들에게 공주임을 인정받는데, 이 모든 과정이 스스로 실력을 키워 이루어낸 것이다.

미실은 그동안 볼 수 없었던 비상한 카리스마를 뿜는다. 배우의 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미실이란 캐릭터가 기존의 사고체계를 뛰어넘기 때문이다. 미실은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3대 왕을 모신 새주(옥새를 관리하는 사람)로서 국정의 최고 실력자이다. 황후가 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왕을 폐위시켜버릴 만큼 권력이 강하며, 다수의 연인과 남편과 아들을 거느린 채 그들의 충성을 받는다.

덕만과 미실은 선악으로 대립하지 않는다. 미실은 악인이 아니라 노련한 협상력과 용인술을 구사하며, 자신의 철학을 내세운다. “백성은 진실을 부담스러워하고 희망을 버거워하며 소통을 귀찮아하고 자유를 주면 망설인다. 세상은 종으로도 나뉘지만, 횡으로도 나뉜다. 횡으로 나누면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가 있으며, 덕만과 나는 같은 편이다”등의 말로 드러나는 그의 철학은 귀족정의 이념을 대변한다.

덕만은 자신에게 대의가 있다고 믿는다. 왕이 되려는 자신은 근본적으로 나라를 생각하며, 왕권과 나라의 근간이 되는 백성들의 삶이 나아지도록 힘쓰기 때문이다. 그는 미실과 대립하며 일식이 주술적 현상이 아니라 자연현상임을 밝혀 신권을 해체하려 한다. 또한 왕이 된 후에는 세금을 감면하고 농지를 개간하고 농사기술을 보급하여 자작농을 늘리려 한다. 이는 왕권 중심의 민본사상을 대변한다. 귀족정을 표방하는 현실 정치인과 군주정을 표방하는 이상주의적 개혁정치인의 정치적 대립이 전면에 깔려있다.

독신 여제와 여왕벌


드라마는 로맨스를 품지만, 기존의 남성중심적 로맨스와는 사뭇 다르다. 처음 덕만을 남자로 안 김유신은 덕만과 우정을 쌓다가 로맨스를 발전시킨다. 비담도 덕만을 짝사랑한다. 하지만 왕이 될 결심을 한 덕만은 연애와 결혼에 뜻이 없음을 밝히고 김유신을 밀어낸다. 하지만 막상 김유신이 미실 집안과 혼인하자 덕만은 몹시 흔들린다. 이후 왕이 된 덕만은 김유신은 물론이고 비담과도 정치적으로 대립각을 세운다.

덕만은 이들을 견제하면서 때때로 사적인 감정을 드러낸다. 후반부에 비담과의 연정이 급물살을 타지만, 덕만은 “나는 여왕이지 이제 여인이 아니기 때문에 나를 가질 수 없다”며 못을 박는다. 왕이라는 공적 자아와 로맨스라는 사적 감정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다. 덕만은 젊은 시절에는 김유신과 도망치고 싶었고, 나중에는 비담과 여생을 보내고 싶었지만 못한다. 그러나 회한은 없다. 덕만은 죽기 직전 어릴 적 꿈에 자신을 껴안은 인물이 바로 장성한 자신이었음을 깨닫는다. “앞으로 죽도록 힘들고 너무나 외로워서 그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될 상황이 오겠지만, 어떤 일이 있더라도 견뎌야 해”라고 말하는 자신을 떠올리는 장면은 덕만의 욕망이 로맨스가 아니라 군주로서의 성장이었음을 암시한다. 실제 선덕여왕에겐 남편이 있었지만 드라마 속 선덕여왕은 비혼 군주로 그려지는데, 이는 현대에 생각한 적절한 여성 리더상이 투영된 것으로 읽힌다.

반면 미실은 훨씬 열정적이고 쿨하다. 미색을 지렛대 삼아 권력을 쥔 여성이지만, 기존 후궁들과는 다르다. 기존 후궁들은 왕의 총애를 얻거나 아들을 낳음으로써 권력을 얻기 위해 경쟁한다. 하지만 그 권력은 남성을 매개해 발현되는 권력이다. 가령 장희빈이 숙종의 사랑을 통해 권력을 얻는다 해도 숙종이 변심하면 언제든 죽음을 맞을 수 있다.


미실의 권력은 그것과 다르다. 선대왕을 비롯해 많은 남자가 미실을 원했고, 미실은 공개적으로 그들과 관계를 맺는다. 미실의 남자들은 때로 경쟁하지만 협력하고 연합한다. 미실이 늘 상석에서 그들에게 지시하고, 그들은 미실의 지략과 명령에 복종한다. 미실은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사람은 사다함이었다고 말하지만, 사랑에 대해 쿨한 태도를 유지한다. 또한 미실은 진지왕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황후가 될 수 없게 되자 버리는데, 그 아들이 비담으로 자란 것을 알게 된 후에도 별로 동요하지 않는다. 이런 모습은 꽤 낯설다. 그동안 배타적인 사랑과 모성애를 절대적인 가치 인양 사고해온 것이 가부장제의 강박을 내면화한 결과는 아닐지 돌아보게 한다.

여성들끼리 경쟁하고 배우는 관계

2009년에는 ‘천추태후’ ‘자명고’ 등 조선 시대를 벗어난 여성 권력자를 그린 사극이 잇달아 방송되었다. 하지만 반응은 썩 좋지 못했다. 전작들과 ‘선덕여왕’은 어떤 점이 달랐던 걸까. ‘선덕여왕’은 김영현 박상연 작가의 공동집필 작인데, 김영현 작가의 전작이 ‘대장금’이다. ‘대장금’은 궁중암투극에서 엑스트라에 불과해 보였던 궁녀들이 전문직업인으로 성장해나가는 과정을 그린 사극이다. 주인공, 경쟁자, 스승, 적 등이 모두 여자들이고, 여성들끼리 경쟁하고 배우며 실력을 연마해나가는 드라마로 어떤 현대극보다 여성을 주체적인 욕망과 의지를 지닌 인간으로 그린다. ‘선덕여왕’의 덕만과 미실의 관계도 적이자 선배이자 스승으로 읽을 수 있으며, 요리가 아닌 통치술을 배우고 토론하고 경쟁하는 장이 열렸다고 볼 수 있다.

덕만과 미실은 정치적 맞수이지만, 서로를 성장시키는 관계다. 덕만은 처음 미실을 접하고 카리스마에 위압된다. 그러나 공주의 신분을 찾은 뒤 “어디 감히 성골의 몸에 손을 대드냐?”고 호통칠 정도로 용기를 키운다. 덕만은 혼인을 추진하려는 아버지 앞에서 자신이 왕이 되겠다는 뜻을 밝히는데, 이는 미실이라는 권력자를 이기기 위해 자신의 야심을 키운 결과이다. 한편 미실 역시 덕만을 보고 큰 자극을 받는다. 기껏 황후가 될 생각을 해보았을 뿐 왕이 될 생각을 해보지 못한 자신을 돌아보고, 그는 쿠데타를 꿈꾼다. 이들은 서로의 도량을 존중하며 훌륭한 점을 찾아낸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서로의 진심을 알아본다. 대야성에서 내전을 준비하던 미실은 백제군의 침략이라는 변수 앞에서 신라의 안위를 생각해 자결을 택한다. 덕만은 미실의 선택을 예상한 듯 “미실에게서 진정한 왕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공격하지 않고 기다렸다”고 말한다. 미실이 진흥왕과 함께 신라의 영토를 확장한 데 대해 자부심을 품고 있으며, 지배욕만 가진 것이 아니라 신라를 사랑하는 마음도 컸다는 사실을 덕만이 알아본 것이다. “당신이 없었다면 난, 아무것도 아니었을지 모릅니다”라는 덕만의 말은 필생의 라이벌이었던 미실에 대한 흠모를 드러낸다.

‘선덕여왕’의 성공에서 보듯, 여성들끼리 기껏 남자가 아니라 진정한 가치를 두고 겨루며 서로에게 더 큰 영감과 용기를 주는 드라마는 대중의 큰 사랑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여성 성장드라마들이 사극으로든 현대극으로든 더 많이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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