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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당] 제비뽑기 전세

손병호 논설위원


대한민국 국민은 어쩌면 전 세계에서 제비뽑기를 가장 많이 하는 국민일지 모른다.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내려면 제비뽑기를 해야 하고, 아파트 분양을 받을 때도 제비뽑기인 컴퓨터 추첨을 거친다. 군 입영 날짜도 제비뽑기로 정하고, 카투사병 선발도 마찬가지다. 요즘 학교에선 코로나19 때문에 누가 밥을 빨리 먹을지 제비뽑기로 학급별 배식 순서를 정하고 있다. 또 방과후수업이 축소되면서 일부 학교에선 방과후수업 강사들이 한정된 수업을 누가 맡을지를 제비뽑기로 정한다고 한다. 생계가 제비뽑기에 달린 셈이다.

그런데 앞으로 우리 국민들은 점점 더 희한한 일에 제비뽑기를 해야 할 것 같다. 7월 말에 계약갱신청구권, 전월세상한제 등의 임대차법이 개정된 이후 전세 품귀 현상이 지속되면서 급기야 제비뽑기로 세입자를 결정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지난 13일 서울 강서구의 한 아파트에 괜찮은 전세 매물이 나오자 9개 팀이 몰려 순서대로 집을 둘러봤고 이후 중개업소로 가서 제비뽑기로 계약자를 정했다고 한다. 집을 보려고 9개 팀이나 줄을 선 것도, 제비뽑기를 한 것도 생경한 풍경이다. 얼마 전 나온 정부 비판 책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의 제목처럼 정말로 이전에는 없었던 일들이 줄곧 생겨나고 있다.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 정치인과 관료들 때문에 국민들만 계속 골탕을 먹고 있는 것이다.

벨기에 역사학자 다비트 판 레이브라우크가 쓴 책 ‘국민을 위한 선거는 없다’에는 주로 기득권층 사람들이 선출되기 마련인 선거제도가 오히려 민주주의를 해친다면서 민의의 대변자를 제비뽑기로 뽑자는 주장이 나온다. 전세 대란을 보노라면 이 주장대로 국민들 가운데 제비뽑기로 국회를 구성하고, 경제부총리와 국토교통부 장관을 제비뽑기로 임명했더라도 지금보다 부동산 시장 상황이 더 나빴을까 싶다. 부동산 사태가 이 정도에 이르렀으면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할 텐데,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 것도 참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누가 책임질지 제비뽑기라도 해야 하는 것일까.

손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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