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소녀도 화가 지망생도 와 보이소”

2020 부산비엔날레 르포

2020부산비엔날레가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를 주제로 부산 을숙도 부산현대미술관, 원도심 일대, 영도다리 인근 옛 선박수리공장 등지에서 한창 열리고 있다. 사진은 옛 선박수리공장과 이곳에서 전시 중인 권용주 작가의 인공폭포(아래).

용두산공원 전망대가 보이는 부산 중구 중앙역 11번 출구 인근 40계단. 이곳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들의 가족 상봉 장소였다. 그때 사람들은 멀리 영도다리가 보이는 계단에 앉아 피난살이 고달픔과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래기도 했다.

원도심으로 불리는 이 일대가 2020 부산비엔날레 전시장으로 변신했다. 지난 8일 노포가 즐비한 골목의 빈 사무실, 대안공간, 카페 등에 꾸려진 전시를 구경하러 갔다. 돈가스집 옆 낡은 계단을 올라가니 부산 원로 작가인 노원희씨의 회화 작품과 아프가니스탄 출신 아지즈 하자라의 영상 작품이 함께 전시돼 있었다. 손목과 얼굴이 잘린 채 몸통뿐인 사람들이 등장하는 노 작가의 회화, 전쟁놀이하는 아프간의 아이를 담은 하자라의 영상은 묘한 화음을 냈다. 둘 다 “용두산 아파트 안에 들어가고 싶었습니다”로 시작하는 박솔뫼 작가의 소설 ‘매일 산책연습’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박 작가는 이 소설에서 권력의 남용 문제를 다뤘다.

올해 부산 비엔날레는 덴마크 출신 야콥 파브리시우스 감독이 지휘했다. 전시주제는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 감독은 편혜영 김숨 등 국내외 인기 소설가와 김혜순 시인 등 문인 11명에게 부산 관련 문학 작품을 집필하게 한 뒤 미술 작가들이 여기서 영감을 얻어 작품을 제작하도록 주문했다.

원도심에서 선보이는 허찬미 작가의 작품.

또 다른 골목에선 부산 거리에서 포착한 잡초를 거친 붓 터치로 표현하는 허찬미 작가의 회화와 물웅덩이를 찍은 캄보디아 작가 반디 라타나의 사진 작품이 한 공간에서 변주되고 있었다. 특히 라타나가 찍은 연못은 자못 목가적인 풍광을 연출하지만, 과거 미군의 폭격으로 생겨난 것이다. 전쟁의 상흔은 그렇게 아시아 전체가 공유하는 정서라는데 생각이 미치게 된다.

역시 박솔뫼의 소설에 등장하는 1982년의 그 유명한 부산미문화원(현 부산근현대역사박물관) 방화 사건의 현장 주차타워도 사진 작품을 랩핑함으로써 전시 공간으로 변모시켰다. 문화재가 된 한국은행 부산지점 외벽에는 람한 작가의 판타지적인 평면 작품이 내걸려 지나가는 시민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지도를 들고 전시장을 찾다 보면 도시의 역사를 탐험하는 것 같다. 도시 구석구석을 전시장소로 쓰는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의 부산 버전 같다.

이번 비엔날레는 사하구 을숙도 부산현대미술관을 주 전시장으로 쓰면서도 원도심 곳곳과 영도다리 인근 선박수리공장까지 전시장으로 끌어들였다. 강풍주의보로 출렁이는 바다를 옆에 낀 선박수리공장에 들어서면 난데없이 폭포 소리가 들린다. 권용주 작가가 폐자재와 천막 천으로 조성한 인공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다. 공장 노동자들을 위한 샤워시설과 휴게시설로 쓰였던 2층짜리 컨테이너도 전시장이 됐다. 2층엔 김희천 작가의 영상작품 ‘탱크’가 선보이고 있다. 잠수부들이 시뮬레이션 훈련에 쓰는 ‘감각 차단 탱크’를 소재로 한 탱크는 연초 서울 아트선재센터에서도 선 뵌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작품은 이곳 컨테이너 안에서 볼 때 비로소 제맛이 나는 것 같다. 이곳에 전시된 미술 작품들은 선박수리조선소에서 일하는 일명 깡깡이 아줌마들의 망치질 소리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김언수 작가의 ‘물개여관’과 연계되어 있다.

이처럼 작품마다 제 장소를 찾아 제대로 전시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작가가 비엔날레를 위해 동원됐다는 느낌보다는 개인전을 열어주듯 한 작가가 충분히 조명되도록 연출됐다는 점도 매력이다.

이번 비엔날레는 ‘빼기의 미학’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한국의 비엔날레가 덩치 경쟁을 벌였다면 이번 부산비엔날레에선 물량 공세가 없다. 총 34개국 89명 작가(문필가 11명, 시각예술가 67명, 음악가 11명)가 참여했는데 시각예술가에 한정하면 67명이다. 2018광주비엔날레에선 무려 42개국 163명이 참여했다.

부산현대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비앙카 봉디의 설치작품.

부산현대미술관 전시 역시 빼기의 미학이 잘 구현됐다. 솎아내서 충분히 보여주는 데 방점을 찍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 비앙카 봉디가 희디흰 소금을 사용해서 꾸민 정원, 구정아 작가의 야광 단색화 방, 서용선 작가의 회화방 등 전시장을 돌다 보면 이 작가에서 저 작가의 작품 세계로 징검다리 건너듯 넘어가는 기분이 든다. 11월 8일까지.

글·사진=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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