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시사 > 전체기사

[청사초롱] 민족정기라는 허깨비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


조정래 작가의 친일파 발언이 논란이다. 일본 유학을 다녀온 사람은 전부 친일파인지, 아니면 그중 토착왜구라고 불리는 일부만 친일파인지 문법까지 따지고 있다. 하지만 그의 발언에서 주목할 것은 친일파의 자격이 아니라 친일파 청산의 목적이라고 본다. 작가는 반민특위를 부활해 150만 친일파를 단죄해야 하는 이유가 ‘민족정기’를 위해서라고 했다. 민족정기란 무엇일까.

민족정기(民族正氣)의 사전적 정의는 ‘한 민족의 공통 의지로서 바르고 큰 기풍’이다. ‘정기’는 오래된 말이지만 ‘민족’과 결합한 지는 오래지 않다. 민족주의가 발흥한 근대의 산물이다. 우리 역사에서는 일제강점기에 해당한다. 민족정기의 원조는 멀리서 찾을 것 없다. 다름 아닌 ‘야마토 다마시이(大和魂)’다.

야마토 다마시이는 일본의 근대화 시기, 전통 정신을 바탕으로 서구 문물을 수용한다는 화혼양재(和魂洋才)에서 나왔다. 서구화를 추진하면서도 고유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절충론으로 중국에서는 중체서용(中體西用), 조선에서는 동도서기(東道西器)로 변주됐다. 여기까지는 좋다. 야마토 다마시이는 군국주의와 결합하면서 폭주하기 시작했다. 천황에 대한 충성과 무(武)에 대한 숭배를 바탕으로 서구 열강에 맞서 싸우는 것이 일본 고유의 정신이라는 주장에 이르렀다. 그것은 자국민의 희생을 강요하고 타민족을 배척하는 전체주의적 이념이었다.

일본은 이 슬로건으로 근대화에 성공했다. 중국과 조선의 지식인들도 자국민의 단결을 위해 이 같은 슬로건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1899년 량치차오가 먼저 ‘중국혼(中國魂)’을 제창했고, 이에 자극받은 최석하가 1906년 ‘조선혼(朝鮮魂)’을 내세웠다. 죽은 사람의 넋을 뜻하는 혼이라는 단어는 이때부터 민족 고유의 정신으로 개념이 바뀌기 시작했다. 박은식은 ‘국혼(國魂)’, 문일평은 ‘조선심(朝鮮心)’이라 했고, 정인보는 혼을 우리말로 바꾸어 ‘얼’이라고 했다. 야마토 다마시이의 대항논리지만 그 아류라는 인상이 짙다. 그래서인지 조선의 혼과 얼은 슬그머니 ‘민족정기’로 대체됐다. 야마토 다마시이의 여러 이름 중 하나가 대정기(大正氣)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 또한 그다지 독창적인 발상은 아니다.

민족정기라는 개념은 1941년 임시정부의 대한민국건국강령에 공식 채택됐다. 이후 친일파 청산을 뒷받침하는 논리로 쓰이기도 했지만 반공의 논리로도 이용됐다. 공산주의가 민족정기를 위협한다는 논리였다. 태생이 군국주의의 슬로건이었던 탓인지, 민족정기가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군사독재 시절이다. 특히 박정희가 민족정기를 애용했다. 그는 첫 대통령 취임사에서 “5월혁명으로 부패와 부정을 배격함으로써 민족정기를 되찾아 오늘 여기에 우람한 새 공화국을 건설했다”고 자화자찬했다. 남산 안중근 기념관에는 지금도 ‘민족정기의 전당’이라는 박정희 휘호를 새긴 비석이 남아 있다. 국민교육헌장에 ‘조상의 빛나는 얼’이 등장하는 것도 박정희의 유난스러운 민족정기 사랑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민족정기는 전체주의의 잔재다. 실체 없는 허깨비다. 국가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고, 이념을 위해 인간을 억압하는 명분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피를 끓게 만드는 강력한 슬로건이기도 하다. 해방과 분단, 독재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더욱 벗어나기 어렵다. 이제 여든을 바라보는 조정래 작가도 예외가 아니다. 내가 그의 소설에 매력을 느꼈던 것은 좌우의 이념을 뛰어넘어 이 땅에서 살아 숨쉬는 사람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작가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나보다. 살아 숨쉬는 사람 150만을 희생해서라도 추구해야 하는 이념의 존재를 믿는 모양이다. 50년 작가 인생은 실체 없는 허깨비를 좇는 과정이었던 것인가.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