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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자녀와 거리두기

이사야 뉴미디어팀 기자


미혼인 친구 한 녀석이 결혼을 망설이는 이유는 ‘자녀’ 때문이다. 딩크족(DINK·Double Income No Kids)을 제안했지만 양가 어른들의 반발 때문에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그가 출산을 기피하는 건 육아가 유발하는 피로나 여가시간의 감소 때문만은 아니다. “자녀에게 집착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그 말을 듣고 얼마 전 다섯 살 난 아들과 마을버스를 기다리던 때가 떠올랐다. 그날따라 아이가 ‘다리가 아프다’며 보챘고, 순간 운수회사에 화가 났다. 항의 전화를 걸까 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버스 배차도 나름의 규정이 있다. 15분마다 한 대씩 오는 버스를 내 아이가 힘들다고 빨리 오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내 화의 출처는 무엇이었을까. 답을 찾기도 전에 고민은 오지 않은 미래에까지 뻗쳤다. 중·고등학생이 된 아들이 만약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된다면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의 결정에 만족할 수 있을까. 감정이 앞서 가해자들에게 물리적 폭력을 가하지는 않을까. 반대로 내 아이가 가해자라면 어떻게든 잘못을 축소시키려 하지는 않을까. 아이가 고3이나 취준생이 됐을 때 만약 특정 대학과 회사의 요직에 지인이 있다면 과연 나는 전화 한 통 넣지 않을 수 있을까.

별걱정이라 하기에는 실재하는 표본이 너무 많다. 우리나라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는 기업의 총수도 아들이 맞고 오자 복수를 위해 몸소 주먹을 날린 적이 있다. 정·재계 유력 인사들이 자녀의 입시나 취업 비리에 연루된 사례는 너무 많다.

이 표본들은 왜 존재해서 별걱정을 하게 만드는가. 최근 화제가 된 전직 4선 국회의원의 말이 답이 될 듯하다. 해당 인사는 아들이 고교생 때 서울대 교수의 도움을 받아 연구를 진행하고 논문 포스터 저자로 등재되도록 압력을 가했다는 의혹이 일자 “엄마의 마음에 궁리하다 지인을 통해 도움을 받은 것”이라 밝혔다. ‘엄마의 마음’. 딸과 아들의 특혜에 개입했다는 의혹 때문에 논란의 중심에 섰던 전·현직 장관들도 혹여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자녀의 앞길에 장애물을 없애고 싶은 건 대다수 부모의 바람이다. 이를 위해 때론 위법행위를 하거나 법의 테두리 안에서 교묘하게 위력을 행사하는 것조차 서슴지 않는다. 신기한 건 사회적 비난과 처벌을 받은 사례가 아무리 넘쳐나도 주술에라도 걸린 듯 비슷한 행위가 반복된다는 것이다.

그런 마음이 드는 이유는 뭘까. 애착에 대한 집착 때문이라는 추측을 해본다. ‘좋은 부모 콤플렉스’(필로소픽)의 저자 최명기 정신과전문의는 아기들이 성장 과정에서 표정이나 몸짓을 통해 부모의 사랑을 얻어낸다고 했다. 입이 트인 후에는 부모가 듣기 좋아하는 말을 해 관심을 받는다. 먹는 것부터 의복 착용, 배변 활동 등에 도움이 필요한 어린아이들이 조력자인 부모와의 긴밀한 애착 관계 형성을 갈구하는 것은 본능일 것이다.

최 전문의는 이 과정에서 부모 역시 자녀에게 애착을 갖게 된다고 했다. 하지만 자녀가 성장하며 부모의 도움이 필요한 영역은 점점 줄어들고, 부모의 애정을 얻기 위해 하던 행동 역시 감소한다. 그러나 여전히 애착을 가진 부모는 자녀를 놓지 못한다. 최 전문의는 많은 부모가 ‘자녀가 판단력도 떨어지고 제구실을 못할 것 같다’고 우려해 자녀와 거리 두기를 못한다고 설명했다.

여기서부터는 합리적인 가설이다. 부모는 옅어진 자녀와의 애착 관계 회복을 원한다. ‘아직도 난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많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방법을 찾는다. 설사 규칙을 어기더라도 자녀의 앞에 꽃길을 깐다. 권력과 재력을 가진 부모라면 규모가 좀 더 넓고 길 수 있다. 그 꽃길 밑에 다른 누군가의 자녀가 매몰돼도 상관없다.

물론 이런 현상이 우리나라에만 있는 건 아니다. 한 예로 지난해 3월 미국에서는 대기업 경영진과 유명 여배우가 자녀의 UC버클리와 UCLA 부정입학에 연루됐다는 게 밝혀졌다. 근데 이걸 위안으로 삼을 수는 없지 않나. ‘자녀와 적절하게 거리 두기’는 전 인류적 과제인가.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자녀를 기르는 부모야말로 미래를 돌보는 사람”이라고 했다. 자녀들이 조금씩 나아짐으로써 인류와 이 세계의 미래는 조금씩 진보하기 때문이란다. 칸트가 세상을 하직한 지 200년이 훌쩍 넘었지만 그의 말은 인용만 될 뿐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이사야 뉴미디어팀 기자 Isaia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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