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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효인·박혜진의 읽는 사이] 당신을 부르는 나직하고 아름다운 소리

반짝이는 밤의 낱말들, 유희경 지음, 아침달, 320쪽, 1만4000원

유희경 시인의 산문집 ‘반짝이는 밤의 낱말들’은 시인의 첫 산문집이면서, 10년에 걸쳐 쓴 글의 묶음이다. ‘밤의 낱말들’ ‘밤의 문장들’ 두 개의 장으로 이뤄진 산문집은 밤에 떠올릴 법한 낱말과 문장으로 시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게티이미지뱅크

말장난 같지만 시는 ‘당신(너)’의 장르이다. 시는 쉬지 않고 당신을 바라보고 호명하고 쓰다듬고 그리워한다. 또한 당연하게도 시는 당신 앞에 있는 ‘나’의 장르이기도 해서, 나는 당신을 향해 끊임없이 고백하고 속삭이고 중얼거리며 때로 소리친다. 시에서 당신은 놀랍도록 여럿이 되기도 한다.

시인은 당신의 의미를 횡으로 확장시키면서 읽는 이를 당신의 세계에 초대한다. 그의 당신이 시의 당신과 겹칠 수 있도록, 읽는 사람 본인이 바로 시 속의 당신일 가능성까지 포함하여. 시에서나 ‘나’는 확장이 아닌 폐쇄가 일어나는 광장이다. 여럿인 당신을 향한 하나인 나의 언어는 쉬운 해석을 허락하지 않은 채로 횡이 아닌 종으로 파고든다. 그래프를 상상해 본다면, 횡과 종의 두 선이 만나는 지점은 결국 하나다. 그 하나의 점이 일으키는 스파크 때문에 우리는 시를 읽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국 시에서 가장 인상적인 ‘당신’의 주인은 물론 허수경이다. ‘혼자 가는 먼 집’에서 이미 도장을 찍었으니, 꽤 오래된 유래라 할 수 있겠다. 시인은 작고하였고 그의 새로운 당신을 만나지 못할 처지이니 이 오래됨은 이제 영원에 가깝게 되어 버렸다. ‘사랑을 나는 너에게서 배웠는데’는 허수경 시인이 2009년에 일간지에 연재한 시 감상기이다. 시인은 감히 해설하고 분석할 수 없는 당신을 다루듯 동료 시인의 시를 대한다. 책에 소개된 50편의 시는 각자의 ‘나’가 되어 셀 수 없이 많은 ‘당신’을 부리고 기린다. 프롤로그처럼 읽히는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같은 시를 쓰는 사람으로, 아니 그의 시를 읽었던 사람의 잠깐의 먹먹함을 느끼지 않기란 어려웠다. “나는 다만 이들을/ 나의 사랑하는 시인들로 기억한다.” 그의 기억을 따라 나 또한 ‘사랑을 나는 너에게서 배웠는데’에 자리한 50편의 시를 새로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거기에 숱한 당신을, 거기에 무수한 나를.


이어서 읽을 책으로 유희경 시인의 산문집 ‘반짝이는 밤의 낱말들’을 골랐다. 때는 긴 여름과 기나긴 겨울 잠깐 기척을 내보인다는 가을이고, 그사이에 시 이야기를 더 해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산문집과 시의 사이 혹은 말랑한 시작 노트와 결연한 일기 사이의 것으로 보이는 유희경의 글에서도 당신은 곳곳에 등장한다. 본래 앞선 시집들에서도 당신을 나직이 부르는 아름답고 진중한 목소리로 정평이 나 있던 시인은 이번 산문집에서 밤에 생각해 봄직한 낱말들을 차례차례 소환한다. 그의 손끝에서 다시 감각하게 된 낱말들, 그러니까 얼굴, 손톱, 우산, 화분, 수업, 테이블 같은 것들 속에 시인인 ‘나’는 깊게 자리한다. 시인이자 시집 서점의 주인이자 40대 남성이고 누군가의 가족인 내가 밤의 낱말과 조응하여 만들어 낸 반짝임이 ‘반짝이는 밤의 낱말들’의 골자이며 흐름이다. 생각보다 단단하고, 그보다는 유연한. 거기에서 나와 당신은 만나고 있다. 만날 수 있다.

시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그럴 때마다 시는 원래 어려운 것이라고 퉁명스레 대답해버리고 만다. 한 사람의 세계가, 영원에 가까울 순간이, 비교적 짧은 몇 문장에 담기었는데, 그게 쉽다면 소름끼칠 일이다. 그러나 쉽기는 어려워도 친하기는 쉬울 수도 있다. 시와 친해지기 위해서 우리는 인터넷에 떠도는 시를 읽을 수도 있고, 책장에 오랫동안 묵혀 있던 예전 시집을 꺼내 볼 수도 있고, 시인이 운영하는 대학로의 시집 서점에 갈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우선하여 ‘나’와 ‘당신’에게 집중해야 할 것이다. 나에게는 가늠하기 어려운 깊이가 있고, 당신에게는 셀 수 없이 많은 다름이 있다. 시는 당신의 장르이다. 시는 나의 글쓰기이다. 그러므로 시를 읽는다는 것은 나와 당신이 만나는 한순간을 즐기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당신에게서 사랑을 배우고, 나에게서 반짝이는 낱말을 꺼내볼 수 있을 것이다. 남은 가을에 당신과 내가 해야 할, 거창하고 사소한 할일이다.

서효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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