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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효인·박혜진의 읽는 사이] “밤과 낮의 언어는 모두 느낌의 언어”

일하는 사람의 생각 / 박웅현·오영식 외 지음, 세미콜론 300쪽, 1만8000원

‘일하는 사람의 생각’은 광고인 박웅현과 그래픽 디자이너 오영식의 대화를 기록한 책이다. 자유롭지만 외로운 예술가와 달리 광고인과 그래픽 디자이너의 생각은 서로 섞일 때 비범해지고 희소해진다. 생각이 모여 화학적 결합이 일어나는 “산업으로서의 창작” 과정에 관한 이야기다. 게티이미지뱅크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기만의 사전이 있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손금은 “손바닥 살갗에 줄무늬를 이룬 금”이다. 유희경 시인의 정의는 다르다. 그는 손금을 일컬어 시간의 모양이라고 말한다. “손금. 나는 궁금하지 않다. 시간이 어떤 모양으로 다가올지에 대해서.”

사전에서 우산을 찾아보면 “비가 올 때에 펴서 손에 들고 머리 위를 가린다”고 나와 있지만 시인은 우산을 가리켜 구석에 놓여 있는 차분한 물건이라고 말한다. “우산. 우리가 바라보는 저 고요하고 차분한 물건은 언제나 당신의 구석에 놓여 있다.”

하나만 더. 사전에서 늦잠은 “아침에 늦게까지 자는 잠”이지만 시인의 마음에서 그것은 꿈의 부스러기다. “늦잠. 작은 소리들이 들린다. 나는 그것이 꿈의 부스러기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한번쯤 자기만의 사전을 상상해 보지만 혼자 만드는 것이라도 사전에는 규칙과 체계, 그리고 보편성이 필요하다. 한번쯤 자기만의 사전을 꿈꾸지만 어떤 사람만 그 사전을 가질 수 있는 이유다.


유희경 산문집 ‘반짝이는 밤의 낱말들’은 각각의 낱말에서 연상되는 짧은 산문을 수록한 산문 모음집인가 하면 하나의 단어를 이야기 형식으로 해제한 문학 사전이기도 하다. 무엇이라 부르든 이 책의 본질은 평범하고 익숙한 단어가 특별하고 낯설게 재인식되는 순간으로 가득하다는 데에 있다. 웃음, 아이, 대화, 구름 같은 단어들과 우리는 종종 권태에 빠진다. 권태로워진 단어와 새로운 관계를 맺을 때 우리 일상에는 사소하지만 중요한 변화가 생긴다. 언어의 다른 문이 열리면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렸던 것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으면 좋았을 것들이 하나둘 수면 밖으로 머리를 내민다. 단어는 인식의 지도다. 단어가 없으면 길을 나설 수도 없고 정확하게 헤맬 수도 없다. 단어의 노화를 두려워하는 태도는 사유의 진부함을 두려워하기 위해 필요한 첫 번째 태도다.

단어에서 비롯된 주관적 감각으로 시작해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 이야기로 끝맺는 이 책의 구조는 박웅현의 ‘여덟 단어’와 닮았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유명한 광고인이라 할 박웅현의 이 책은 우리 삶의 중요한 가치로 다음의 여덟 단어를 꼽는다. 자존, 본질, 고전, 견, 현재, 권위, 소통, 인생. 이것은 박웅현이 지닌 ‘반짝이는 밤의 낱말들’이었을 것이다. 시인이 단어의 늙음에 저항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광고인들은 고정관념을 전복하는 메시지가 담긴 카피를 통해 세상을 좀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고 싶어 한다.

시나 소설이 예술로서의 창작을 생산한다면 광고는 산업으로서의 창작을 생산한다. 박웅현이란 이름과 함께 떠오르는 “넥타이와 청바지는 평등하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차이는 인정한다. 차별에 반대한다” 등의 카피는 상업이라는 영역에 속해 있고 이윤을 내기 위한 활동으로 구분되지만 그 효과는 숫자로 표현할 수 있는 범위를 훌쩍 넘는다.

시인의 단어 수집 노트에 이어 읽을 책으로 다소 간극이 넓지만 ‘일하는 사람의 생각’을 골랐다. ‘일하는 사람의 생각’은 산업으로서의 창작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여덟 개의 ‘팁’을 화두로 광고인 박웅현과 그래픽 디자이너 오영식이 주고받은 대화를 기록한 대담집이다.

이 책에 따르면 광고는 브랜드 디자인을 위해 “아름다움이란 느낌의 언어”를 활용한다. 넘쳐나는 정보의 시대에서 중요한 것은 많은 정보가 아니라 희소한 느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유로운 예술가와 달리 협업을 해야 하는 광고와 디자인 분야에서 느낌의 언어를 발견하기 위해 불러일으켜야 하는 영감은 혼자만의 비범한 생각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이 섞여서 화학적 결합”이 일어날 때 비로소 협업에 의한 영감, 그러니까 일하는 사람들의 영감이 실현된다.

시인의 사전이 별빛을 닮은 밤의 언어라면 광고인과 디자이너의 사전은 아직 다 사라지지 않은 꿈의 부스러기를 닮은 낮의 언어다. 그런데 비교하며 읽으면 차이점보다 비슷한 점이 더 눈에 띈다. 밤의 언어든 낮의 언어든 모두 아름다움이라는 느낌의 언어이기 때문일 것이다. 느낌 없는 단어가 많아진다고 느낄 때 우리 삶을 돌아볼 일이다. 평범해지고 있는 건 단어가 아니라 아름다움이 소멸해 가는 우리 삶 자체일지 모르니.

박혜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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