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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화학당의 어머니, 조선 여성을 깨우다

조세핀 캠벨 선교사 서거 100주년… 그의 삶과 신앙

“1887년부터 중국에서 음악 교사, 학교 교장, 병원 보조자, 여성을 위한 복음 사역자로 활동했다. 남감리회 여선교회 본부로부터 한국 개척 사역 요청을 받자 그녀는 기쁘게 응답한 뒤 한국으로 향했다.”

‘미국 남감리회 여성과 선교’라는 책자에 남아 있는 조세핀 캠벨(1852~1920) 선교사에 대한 기록이다. 중국 상하이에서의 사역을 뒤로하고 한국으로 와 복음의 씨앗을 뿌렸던 캠벨 선교사가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100년이 됐다. 서거 100주년을 맞아 신앙의 후배들이 그의 삶과 신앙을 되새기는 다양한 행사를 준비 중이다.

조세핀 캠벨 선교사(뒷줄 오른쪽 끝)가 1906년 배화학당 학생들과 학교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국민일보DB

미국 남감리회 여성 해외선교회의 파송을 받은 캠벨 선교사는 1897년 10월 9일 제물포항에 첫발을 디뎠다. 여성 해외선교회는 캠벨에게 특별한 사명을 부여했다. 한국의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이들을 교육해 지도자로 키워달라는 것이었다.

한국에 터를 닦은 캠벨 선교사는 21년 동안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신학문을 가르쳤다. 그리고 이들을 전도자로 훈련했다. 그에게 ‘여성을 깨운 선교사’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이유다.

그가 남긴 선교의 결실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1898년 10월 서울의 자골에 여자기숙사를 설립했다. 이 기숙사가 배화학당의 모태로 지금의 배화여자대학교로 성장했다. 2년 뒤인 1900년 초 캠벨은 서양식 2층 교사를 짓고 학당의 외연을 확장한다. 같은 해 4월 15일은 부활주일이었다. 이날 캠벨은 학당 예배실에 자교교회를 설립했다. 초대 담임목사는 로버트 하디 선교사였다. 하디는 1903년 원산 대부흥 운동의 주역이 됐다.

배화학당과 자교교회는 꾸준히 성장했다. 학교는 증축을 거듭했고 1906년 자교교회 교인은 100명을 넘어섰다. 1910년에는 서울 종로구 도렴동에 1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벽돌 예배당을 짓고 종교교회라고 이름 붙였다. 캠벨은 교회 근처에 있던 ‘종침교’라는 다리에서 교회 이름을 따왔다.

1912년에는 수표교·광희문·석교교회 여성들을 전도부인으로 훈련하는 교육과정을 운영한다. 전도부인은 선교사와 목사를 도와 복음을 전하던 여성 평신도 사역자를 뜻한다.

남감리회 선교부는 1917년 65세가 된 그에게 새로운 사역을 맡겼다. 서울 세브란스병원 수간호사였다. 세브란스의과대학 간호학교 교장도 겸직하며 우리나라 간호사 양성의 기틀을 닦는다. 그는 미국 시카고대학병원 간호학교에서 교육받은 정식 간호사였다.

간호학교 교장은 그의 마지막 활동이 됐다. 1918년 건강이 악화해 귀국길에 올랐다. 한국을 사랑했던 캠벨 선교사는 이듬해인 1919년 7월 돌연 한국행을 선택한다. 남감리회는 펄쩍 뛰었다. 아픈 몸으로 장거리 여행을 하는 건 무리였기 때문이다. 조선으로 간다는 건 치료를 포기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배화여대 학생들이 2019년 서울 마포 양화진외국인묘원의 캠벨 선교사 묘지에서 기도하고 있다. 배화여대 제공

아무도 그의 결정을 뒤집지 못했다. 안타까워하는 동료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조선을 위해 일했고, 조선으로 돌아가 묻히겠노라.” 다시 돌아와 채 1년을 살지 못하고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생전 그의 바람대로 서울 마포 양화진외국인묘원에 안장됐다.

캠벨 선교사가 세운 대학과 교회를 중심으로 최근 조세핀 캠벨 선교사 서거 100주년 기념사업회(사업회·회장 최이우 목사)를 조직했다. 사업회는 다음 달 12일 서울 종로구 배화여자대학교에서 기념학술제를 열고 캠벨 선교사가 남긴 선교의 결실을 점검한다. 15일에는 서울 종교교회에서 캠벨 선교사 서거 100주기 추모예배도 드린다.

학술제에서 ‘캠벨 부인의 조선 사랑’을 주제로 기조 강연을 하는 이덕주 감신대 은퇴교수는 “캠벨 선교사는 1898년 여성 교육기관인 배화학당을 세운 뒤 14년 동안 교장으로 활동했다”면서 “자교교회와 종교교회도 설립했고 수표교·광희문·석교교회의 여성 교육사업과 전도부인 양성에 매진한 여성 계몽 운동의 선구자였다”고 소개했다. 그는 “우리나라 선교역사에 굵은 흔적을 남긴 캠벨 선교사를 기억하는 움직임이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이 지나 새롭게 시작된 게 기쁘다”면서 “그가 세운 학교와 교회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평가했다.

최이우 종교교회 목사도 “교회 설립자의 사역을 기념하고 추모하는 일은 후배들의 책임”이라면서 “한국을 누구보다 사랑했고 누구보다 열심히 사역했던 캠벨 선교사의 사역을 조명하고 그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기념사업을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배화여대 교정에 있는 캠벨 선교사의 흉상. 배화여대 제공

캠벨은 35세에 선교에 투신했다. 1885년 남편과 두 자녀가 모두 병으로 세상을 떠난 게 계기였다. 가족을 한꺼번에 잃은 아픔을 딛고 전도자의 삶을 살기로 한 그의 첫 사역지는 중국 상하이였다. 1887년 사역을 시작해 1896년 안식년 휴가를 위해 미국으로 귀국했다. 그는 남감리회의 부름에 응해 우리나라로 사역지를 옮겼다. 45세 때였다. 선교사 중에서도 선임이던 그는 복음을 전파하면서도 20~30대의 젊은 선교사들도 돌봤다. 선교사들에게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다.

100년 전 양화진에 묻힌 그의 묘비에는 요한계시록 14장 13절 말씀이 적혀 있다. “주 안에서 죽은 자는 복이 있도다.” 그의 인생을 정리한 글귀가 신앙의 후배들에게 주는 울림은 여전히 크다.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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