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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춘추] 고질라 최후의 일격을 맞은 일본

천지우 논설위원


고질라 습격은 대지진과 원전 사고로 무너지는 일본을 의미
대등해진 한·일은 징용문제에 서로 양보할 생각 없어 공전 중
양국이 전향적으로 협력하면 아시아의 게임체인저 될 텐데

유치한 괴수 영화인 줄로만 알았는데 아니었다. 2016년 일본 도호영화사가 제작한 ‘신 고질라’에는 원폭의 기억, 대지진과 원전사고, 방사능 공포, 위압적인 미국, 무의미한 회의와 결재 도장에 집착하는 답답한 관료제 등 일본의 정치·사회를 구성하는 키워드가 가득했다. 60년 전 바다에 버려진 핵폐기물을 먹고 자란 괴수 고질라가 갑자기 도쿄에 상륙해 도시를 박살낸다. 정부는 우왕좌왕, 속수무책이다. 미국이 최후의 수단으로 도쿄에 핵무기를 떨어뜨리려 한다. 이를 막으려는 일부 공무원들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고질라가 동결(말 그대로 얼어붙음)돼 겨우 한숨을 돌린다.

고질라의 습격은 2차 세계대전 때 일본에 떨어진 원폭이면서 2011년 3·11 동일본대지진과 이로 인한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의미한다. 고질라가 현재의 일본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내버려진 것들로, 일본인의 죄책감과 자기 처벌 욕망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아직도 완전히 수습되지 않았다. 원전 오염수를 처리하는 문제만 봐도 해결이 쉽지 않다. 바다에 버리려 하자 인근 지자체와 어민, 환경단체, 한국 등이 반발한다.

고질라의 습격이 뜻하는 일본의 붕괴는 지금 한·일 관계를 악화시킨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일본 정치학자 시라이 사토시는 전후(2차 세계대전 후) 일본에서 지속됐던 평화와 번영의 시대가 끝났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 시점에 ‘최후의 일격’처럼 일어난 사건이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라고 했다. 그는 “전후의 유산이 이미 상당히 무너져내리고 있었지만 그야말로 물리적으로 깡그리 무너졌다는 느낌으로 다가왔다”고 말했다.

요시미 슌야 도쿄대 교수는 헤이세이 30년(아키히토 일왕이 재위한 1989~2019년) 동안 일본이 단계적으로 쇠퇴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1989년 버블경제 붕괴, 1995년 한신·아와지대지진과 옴진리교 사건, 2001년 9·11 테러 이후 국제정세 불안, 2011년 동일본대지진과 원전사고를 일본의 쇠퇴에 박차를 가한 4가지 쇼크로 꼽았다.

이처럼 일본이 주저앉는 사이 한국과 중국은 성장했다. 일본은 아시아 주도권을 중국에 내줬고, 한국과는 기존의 우열 관계가 거의 사라졌다. 우치다 다쓰루 고베여학원대 명예교수는 “이제 일본은 그저 그런 존재가 됐고, 중국과 한국에 강한 경쟁의식을 갖게 됐다”고 설명했다.

한·일이 대등해지니 어느 한쪽도 양보하려들지 않는 것이다. 양국 간 핵심 현안인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는 답이 보이지 않는다. 2018년 한국 대법원의 배상 판결로 피고인 일본 기업의 자산이 압류돼 현금화를 앞두고 있다.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을 한국이 어긴 것이니 현금화를 책임지고 막으라고 요구하는 반면, 한국 정부는 사법부의 결정에 개입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양쪽 다 한 발짝도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인다. 한국에선 차제에 청구권협정 자체를 재검토해 한·일 관계를 다시 설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 갈등이 어떻게 귀결될지는 모르겠다. 다만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퍼시픽포럼의 브래드 글로서먼 선임고문이 ‘피크 재팬’이란 책에서 내놓은 조언이 한·일 양국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글로서먼은 피크(정점)를 찍고 내리막길을 걷는 일본을 향해 ‘아시아로의 복귀’를 권하면서 “한국 및 중국과 새로운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한국을 향해선 “일부는 일본의 어려움을 고소하게 여길지도 모르지만, 통찰력 있는 사람이라면 한국의 운명이 일본과 똑같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달을 것”이라며 공동의 미래를 위해 협력할 것을 촉구했다.

글로서먼은 한·일이 협력한다면 아시아에서 영향력이 훨씬 커질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지난 27일 한 포럼에서 한·일이 우호 관계를 넘어 동맹 관계가 되면 그 자체로 ‘게임 체인저’가 되리라고 전망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최 명예교수는 “한국이 외교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선 일본을 움직여야 하며, 대북 정책도 일본이 공조하지 않고선 성공하기 힘들다”고 강조했다. 과거 지향에서 벗어나 각자의 이익을 위해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맺는 것, 이건 반일(反日)이 국시(國是)가 아니라면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천지우 논설위원 mogu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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