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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열며] 울분 사회

권혜숙 인터뷰전문기자


마이클 더글러스가 주연한 할리우드 영화 ‘폴링 다운’(1993)은 한국인 비하로 시끄러웠던 작품이다. 영화에서 슈퍼마켓 주인으로 등장하는 한국인은 잔돈을 바꿔달라는 주인공에게 물건을 사라고 강요하고, 터무니없는 바가지를 씌운다. 분노가 폭발한 주인공은 주인을 구타하고 가게를 부순다. 논란이 커지면서 영화는 국내 개봉이 미뤄지기도 했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유명순 교수는 이 영화가 극심한 울분을 겪고 나서 생기는 ‘외상 후 울분장애’의 사례를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아내에게 이혼당하고 직장에서도 해고된 주인공이 자신과 대치했던 이들을 폭력으로 응징하고 결국 자신도 파멸하는 상황이 그렇다는 것이다.

울분은 직장 문제, 이혼, 사회고립, 질병 등 자신이 생각할 때 부당하다고 여기는 일이 생기고, 그 때문에 공정하리라 여겼던 세상에 대한 믿음이 깨지면서 느끼는 감정을 가리킨다. 어떤 노력을 해도 소용없다는 무기력이 더해진다는 점에서 분노와 다르고, 감정을 터뜨린다는 점에서 속으로 억누르는 전통적인 화병과 다르다. 울분은 지금의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주요한 감정 중 하나로 주목받고 있다. 울분은 젊은층의 키워드인 ‘공정’과 관련 있고, ‘묻지마 범죄’와 혐오 표출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지난 1월 이뤄진 조사에서 응답자의 13.3%가 중증 울분이었고, 만성적인 울분까지 포함하면 절반 가까운 47.3%가 울분 상태로 나타났다. 저소득층, 1인 가구와 함께 세대별로는 2030세대의 울분도가 가장 높았다. ‘주요 울분 상황’ 5위 안에 ‘정의에 어긋나고 불공정한 일’이 꾸준히 포함되는데, 독일 등 외국 조사에서는 상위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한다. 서울대 행복연구센터가 1990~2018년 제목이나 본문에 울분이 포함된 국내 7개 종합 일간지 기사를 분석했더니 주요 울분 유발자는 정부와 고위 공직자, 정치인, 기업 등 순으로 집계됐다.

지난달 만난 유 교수는 “때로는 울분이 내면의 목소리를 외부로 향하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며 울분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정치나 경제 상황을 보며 꾹꾹 눌러 담아뒀던 울분이 대중으로 하여금 광장으로 나가게 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울분이 심해지면 ‘버닝(burning)’이 생기는데, 말 그대로 자기를 태워버리고 파괴하는 감정을 말한다. 폭발 대신 버닝이라는 표현을 쓰는 건 폭발시켜 바깥으로 감정을 내보내는 게 아니라, 안팎으로 타올라 나도 다치고 상대도 다칠 수 있기 때문이다. 유 교수는 내년 초 코로나19 이후의 울분 연구를 진행할 계획이다. 코로나로 인해 한국 사회에 어떤 부당하고 부정의한 일이 생겼는지 질문해봐야 한다고 했다. 더 장기적으로는 통일 이후에 대한 연구까지 필요하다. 울분 연구는 독일에서 본격적으로 진행됐는데, 그 계기가 통일 뒤 옛 동독 출신 사람들이 2등 시민이라는 열패감에 빠졌기 때문이고, 이후 외상 후 울분장애라는 진단명도 생겨났다.

한창수 고려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지난해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춘계 학술대회에서 “울분장애는 우울증보다 더 오래 지속되고 잘 치료되지 않는다”고 했다. 유 교수의 해법은 이렇다. 규칙을 지키고 특혜와 갑질을 근절하며, 소통하고 연대할 것. 우리 사회는 과연 ‘나와 우리의 감정’을 보살필 수 있을까. 유 교수의 온라인용 인터뷰 기사에 함께 실은 울분도 측정 검사를 해봤다. 19개 문항의 평균 점수를 따지는데 1.5점 이하면 이상이 없는 상태, 1.6~2.5점은 만성적으로 울분이 쌓여 있는 상태, 2.6점 이상은 심한 울분 상태다. 결과는 1.5점, 아슬아슬하게 울분 상태를 피했다. 당신의 마음은 안녕하십니까.

권혜숙 인터뷰전문기자 hskw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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