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 없이 전해지는 감동… “말 필요 없는 연기 하고 싶었다”

영화 ‘내가 죽던 날’ 배우 이정은

12일 개봉하는 영화 ‘내가 죽던 날’에서 이야기의 열쇠를 쥔 순천댁을 연기한 배우 이정은. 그는 “흥미로운 이야기 안에서 살 수 있는 배우의 삶은 행복한 것 같다”고 했다.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12일 개봉하는 영화 ‘내가 죽던 날’에서 배우 이정은은 말이 없다. 아니, 할 수 없다. 그가 연기한 순천댁이 농약을 먹고 목소리를 잃은 신산한 인물이어서다. 그런데 그가 스크린으로 전하는 감동만큼은 어떤 작품보다도 묵직하다. 9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이정은은 “사투리같이 언어로 살리는 배역만 하다 보니 어느 날 문득 대사가 지겹더라”면서 “설명이 필요 없는 연기를 하고팠던 차에 훌륭한 대본을 만났다”고 떠올렸다.

‘내가 죽던 날’은 외딴섬 절벽에서 사라진 소녀 세진(노정의)과 그를 쫓는 형사 현수(김혜수), 그리고 말 못 하는 목격자 순천댁의 얘기를 그린다. 남편의 외도와 팔 마비로 절망하던 현수는 실종사건 조사를 하던 중 순천댁을 만나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미스터리 같은 영화는 사실 인물 내면을 현미경처럼 들여다보는 휴먼 드라마에 가깝다. 특히 김혜수가 “주제를 꿰뚫는다”고 묘사한 순천댁은 절벽에 내몰린 이들에게 진심으로 다가가 그들이 일어설 실마리를 던진다. 이정은은 “요즘 안타까운 자살을 보면 개인이 감정을 토로하는 게 쉽지 않은 사회인 것 같다”며 “사건 뒤에 가려진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작품이어서 매료됐다”고 말했다.

이정은에게 이번 영화는 김혜수와 함께해 더 매력적인 시간이었다. 연극 ‘한여름밤의 꿈’으로 데뷔한 1991년부터 대학로에서 관객을 만난 이정은과 연예계 톱스타로 드라마·영화를 오간 김혜수는 궤적은 달랐어도 연기라는 접점에서 여러 번 마주쳤었다. 이정은은 “과거 혜수씨 동생과 연극을 할 때 매번 찾아와 응원하는 걸 보면서 품이 다른 배우라는 생각을 했었다”면서 “후배 배우들과 제작진을 먼저 챙기는 어른 같은 연기자”라고 칭찬했다.

이정은은 1987년 민주항쟁을 계기로 배우의 길에 들어섰다.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한 그는 한해 20만원 남짓한 수입에도 무대를 포기하지 않았다. “연기를 할 때 삶이 생동감 넘치게 느껴져서”다. 생계를 이으려 불혹까지 녹즙 판매원, 채소장사를 병행하는 수고도 마다치 않았다. 이정은은 “그래서인지 체력도 좋다”며 웃어 보였다.

지금까지 성실한 ‘다작’으로 약 70편 안팎의 작품에 얼굴을 비춘 이정은은 2018년부터 빛을 냈다. ‘미스터 션샤인’ ‘눈이 부시게’ ‘동백꽃 필 무렵’ 등을 줄줄이 히트시킨 그는 영화 ‘옥자’(2017)의 옥자, ‘미스터 주’(2020)의 고릴라 목소리를 연기한 이색 이력도 있다.

독특한 건 의뭉스러운 가정부 문광(‘기생충’), 섬뜩한 고시원 주인(‘타인은 지옥이다’) 등 최근 배역 대부분이 괴이한 스릴러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작품을 모니터링하는 어머니가 “더 곱고 사랑받는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고 부탁했을 정도다. 이정은은 “내 얼굴이 순진해 보이기도, 뚱해 보이기도 해서 감독님들이 반전의 열쇠로 쓰는 걸 좋아하시는 것 같다. 나도 연기하는 재미가 있다”고 전했다.

‘타고 났다’는 인상의 배우 중 한 명인 이정은은 요즘도 “막히는 대사 1~2줄을 이해하려 배낭 메고 현장을 찾는다”고 한다. 날카로운 평가도 더 신경 써 들으려 한다. 공부할 게 아직 많다는 이정은은 “최근 ‘평범한 연기는 못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을 들었는데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가 작품마다 펼쳐 보인 호연은 끈기의 결과였던 셈이다.

강경루 기자 ro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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