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는 시대다]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 질문

<13> 거짓말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누구나 읊어보았을 유치환의 시 ‘행복’의 배경에는 20여 년 동안 한 여인을 향해 수 천 통의 편지를 보냈던 한 남자와 그를 옆에서 지켜보아야만 했던 그의 아내가 있었다. 다른 여인을 향해 연서(戀書)를 써 내려가는 남편을 바라보는 그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시작부터 누구는 가해자가 되고 누구는 피해자가 되어야 하는 그 예민하고 부담스러운 이야기는 그래서 드라마의 단골 소재이기도 하다.


1998년 방송한 KBS 2TV 드라마 ‘거짓말’은 노희경 작가의 다섯 번째 작품으로, 운명처럼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거짓말이라는 상징적인 내면 언어로 그렸다. 사진 오른쪽부터 불륜에 빠진 준희(이성재)와 성우(배종옥), 준희의 부인 은수(유호정)의 모습. KBS 제공

KBS 2TV 드라마 ‘거짓말’(1998)은 운명처럼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들의 사랑은 설렘으로 들떠 있지 않았다. 보고 싶은 마음이야 차고도 넘치지만 사랑을 쫓아다니지도 않았다. 마음이 향하는 곳을 응시하며 끊임없이 자신에게 물었다. 사랑이 무엇이냐고. 사랑은 어떠해야 하냐고. 섬세하고 관조적인 시선으로 불륜과 사랑의 경계가 어디쯤인지, 현실의 조건이 만들어놓은 불가능한 사랑이란 있는 것인지, 사랑에 대한 도덕과 책임의 기준은 무엇인지를 담담하게 풀어간 ‘거짓말’은 낯설지만 따뜻한 사랑 이야기였다.

사랑, 그 자체에 대해 묻다

성우(배종옥)와 준희(이성재)의 사랑을 사람들은 불륜이라 부른다. 같은 회사 선후배인 두 사람은 금기의 사랑임을 알지만 서로에게로 향하는 마음을 멈출 수 없었다. 오래전 유부남과의 사랑으로 큰 상처를 입은 적이 있는 성우는 이 사랑이 가져올 슬픈 결말이 두려웠다. 유부남인 준희도 사랑의 균열이 불러올 내일이 두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내 은수(유호정)와 함께 있어도 성우가 보고 싶어지기 시작하자 준희는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내가 아무도 안 다치게 했으면 좋겠어”. 은수는 사랑이 흔들리고 있음을 직감했다.

KBS 제공

삼각관계의 주인공이 된 이들은 사랑을 독차지하고자 상대방을 향해 포악스러운 말을 퍼붓지도, 거친 행동으로 허탈한 상처를 남기지도 않았다. 성우는 감정이 이성보다 앞서지 않도록 자신의 행동을 객관화시키려 했다. 은수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준희의 마음을 흔들어놓은 것은 아닐까 봐 겁이 나기도 했지만 금방 지나갈 것이라며 애써 모든 것을 외면했다. 준희가 은수를 쉽게 떠날 수 없었던 것은 은수의 아픈 기억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은수의 옛 연인이었던 동진(김상중)이 사고로 허리를 다쳐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자 그는 은수의 행복을 위해 떠났다. 동진의 부재를 준희가 채워줬지만 은수의 마음 한쪽엔 그에 대한 감정이 남아있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은수 곁에 있었던 것이 준희의 사랑이었다. 혼자 남겨지는 것을 두려워한 은수는 “우리 셋이 같이 살자”며 준희를 잡았다. 사랑 때문에 아파하는 성우를 외면할 수 없는 준희는 이혼을 선택했지만 성우와 준희의 사랑은 이뤄지지 않았고 준희와 은수는 천천히 이전으로 돌아갔다.

준희와 은수의 재결합이 흔히 볼 수 있는 불륜의 당연한 결과는 아니었다. 사랑이란 것이 욕망을 앞세워 누군가로부터 빼앗을 수 없음을, 사랑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고 마치 지금 사랑 이전엔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갈 수 없음을 알기에 성우나 은수, 그리고 준희는 억지를 부리지 않았을 뿐이다.

이들과 달리 셋이 함께 한 사랑도 있었다. 동진은 신문기자다. 사건 취재 과정에서 알게 된 거리의 부랑아 세미(추상미)가 안쓰러웠다. 싸우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사사건건 사람들과 부딪히는 그녀는 길에서 만난 남자들과 몇 시간 동안 놀아주고 그 돈으로 삶을 이어가는 하루살이였다. 그녀 옆엔 장어(김태우)가 항상 함께했다. 기지촌 출신 엄마를 두었다는 공통점을 가진 둘은 세상에서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가시 돋친 세미의 행동들은 동진의 연민을 자극했고 비루하기 그지없는 삶의 늪에서 허덕이는 세미를 그는 구해주고 싶었다. 이 파격적인 사랑의 조력자는 장어였다. 사회성이 떨어지긴 해도 순수한 그는 누구보다 세미를 사랑하지만 자신의 부족함이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없음을 알기에 이들의 사랑이 이뤄지길 진심으로 바랐다. 어찌 보면 비현실적이기도 하지만 동진의 가족은 세미를 반대 없이 며느리로 받아들였고, 중국 특파원으로 떠나는 길엔 장어도 함께 했다. 사랑은 그렇게 고정관념의 벽을 뛰어넘으며 상처 입은 사람을 보듬고 위로해주었다.

성우의 엄마 윤희(윤여정). KBS 제공

한편 노년의 사랑은 현실적이었다. 성우의 엄마 영희(윤여정)는 첫눈에 반해 열아홉에 결혼했고, 서른도 되지 않아 사별했다. 취미 삼아 드나들던 신문사 부설 문화센터에서 어릴 적 알고 지냈던 현철(주현)을 만났는데 은근히 설렜다. 세월은 청춘의 흔적을 지워가고 있었지만 마음은 아직도 열 몇 살 같았고, 묻어두었던 꿈도 되살아나는 듯했다. 현철이 신문사에서 명예퇴직하고 실의에 빠져있자 영희는 현철과의 결혼을 결심했고, 이들은 가족의 축복 속에 재혼했다. 사랑이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50대의 이들에게도 사랑은 계절이 바뀌듯 다시 찾아왔고, 잔잔한 꽃으로 피어났다.

‘거짓말’이 보여준 사랑은 남녀 간의 감정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해이고 공감이었다. 누구도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랑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우선이었던 이들에겐 사랑이 이뤄지고 아니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삶이란 것이 매번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는 것처럼 사랑도 그러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사랑했던 모든 시간만큼 우리는 성숙해졌고, 상처받았던 모든 사람은 그렇게 사랑으로 위로받을 수 있었으니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가는 존재임이 분명했다.

‘노희경표 드라마’, 하나의 장르가 되다

MBC 베스트 극장 ‘엄마의 치자꽃’으로 데뷔한 노희경 작가의 다섯 번째 작품인 ‘거짓말’은 노희경표 드라마를 하나의 장르로 만들었다. 인간에 대한 심도 있는 관찰은 인간의 감정과 심리 변화를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수없이 반복되는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 그리움과 외로움, 실패와 성공의 일상을 세밀하게 그려냈다. 때로는 냉정했고, 때로는 너무나 따뜻했던 노희경의 인물들은 어떤 삶을 살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는 그들만의 이유를 명료하게 보여주었다.

KBS 제공

삶을 바라보는 사색적인 시선 때문인지 노희경표 드라마는 유독 명대사가 많다. “사랑은 교통사고 같은 거야. 교통사고처럼 그냥 길 가다 아무나 하고 부딪힐 수 있는 것이 사랑이야”(영희), “사랑을 하면서 강한 사람은 없어. 사랑하면 모두 약자야. 상대에게 연연하게 되니까, 그리워하게 되니까. 혼자서는 도저히 버텨지지 않으니까. 우린, 모두 약자야”(성우), “사랑은 해도, 제발 자지마”(은수) 등 등장인물들의 마음을 담아낸 대사는 한 편의 시였다.

연출 또한 달랐다. 노희경 작가하면 떠오르는 표민수 PD. 그의 첫 번째 장편 드라마가 ‘거짓말’이다. 그는 과감하면서 다채로운 앵글과 빛의 조절로 등장인물들의 감정 변화를 극대화했고, 군더더기가 될 수 있는 서사를 최소화하면서 절제의 미를 살려냈다. 감정의 변화를 화면에 오롯이 담아내기 위해 그는 오버숏 기법을 자주 사용했다. 한 인물 너머로 상대의 모습을 동시에 담아내자 평범했던 장면은 입체적으로 살아났고 복합적 두 사람의 감정은 자연스럽게 대비되었다. 성우나 은수, 준희 모두를 힘들게 한 막막한 감정들은 텅 빈 주차장이나 인적 드문 가로수 길의 공허함 위에 다양한 빛을 얹어 감정의 깊이를 조절하기도 했다.

이렇게 색다른 시선으로 그려낸 ‘거짓말’의 시청률은 15% 내외였지만 PC 통신을 통해 화제가 되면서 동호회가 만들어졌고 최초의 ‘마니아 드라마’로 기록되었다. 비록 처음엔 소수의 열광적인 찬사만 있었지만 지금도 인터넷 카페는 운영되고 있고 회원들은 노희경 작가의 신작을 비롯한 근황을 공유하고 드라마 관련 정보를 교환하며 변치 않는 팬심을 지켜가고 있다.

“그들 중 누구도 서로를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 기억 때문에 행복했다. 거짓말처럼.” 드라마의 마지막 자막처럼 ‘거짓말’은 그렇게 오래도록 시청자들의 마음에 남아 사랑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묻고 있었다.

공희정 드라마 평론가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