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미안해, 봉제노동자라서” 전태일 자리 채운 엄마들

법 사각지대 방치된 봉제공… “근로기준법 준수” 외침 허공에

봉제노동자 홍희종씨가 12일 서울 중구 신당동의 한 공장에서 미싱을 돌리고 있다.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요구하며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지 반세기가 지났으나 근로기준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노동자들의 현실은 여전히 열악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태일 열사가 열악한 봉제업계의 노동 현실을 세상에 알리고자 분신한 지 어느덧 반세기가 지났다. 그러나 국민일보가 만나본 2020년 봉제노동자들의 삶은 그때와 큰 차이가 없었다. 값싼 중국산 제품의 공세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사태까지 겹치면서 이들은 지금도 법의 사각지대에서 하루하루 힘겹게 지내고 있었다.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하루 앞둔 12일. 서울 중구의 한 봉제공장 철문을 열고 들어가자 천장까지 쌓인 옷가지와 봉제도구 사이로 한 사람이 겨우 지날 만한 비좁은 통로가 나왔다. 그 끝에 위치한 공장에서 6명의 노동자를 만날 수 있었다.

공장에서 만난 홍희종(51·여)씨는 중학교 2학년 때 집이 어려워지자 18세인 1986년 학업을 그만두고 봉제업에 뛰어들었다. 가세가 기울자 어쩔 수 없이 뛰어든 지 어느새 30년이 넘었다. 희종씨가 처음 ‘시다’(미싱사 보조)로 받은 월급은 14만5000원. 필수 지출 비용을 빼고 나면 당시 유행하던 경양식 돈가스 하나(2500원) 마음대로 사먹기 어려웠다.

하지만 14만5000원을 손에 쥐기 위해 어린 여공(女工)이 감당해야 했던 노동 강도는 상상 이상이었다. 최대한 많은 노동자를 수용하기 위해 복층으로 만든 작업장에서는 또래보다 몸집이 작은 희종씨도 허리를 펴고 앉을 수 없었다. 15평 남짓한 공간에 20여명의 노동자가 다닥다닥 붙어 하루하루를 버텼다. 제대로 된 창문이나 환기시설이 없어 옷감에 붙어 있던 뿌연 먼지들은 여공의 콧구멍, 목구멍으로 들어갔다. 먼지를 머금은 희종씨 눈에서는 때마다 누런 진물이 흘러나왔다.

숙녀복을 만드는 미싱사 홍은희(53·여)씨도 18세 때인 84년 이모의 권유로 ‘시다’가 됐다. 형편이 어려운 집안에서 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그는 숙식을 제공해준다는 말에 냉큼 봉제공장에 취직했다.

은희씨는 1주일에 2~3일을 연속 밤 새워 일하는 속칭 ‘올나이트’ 조에 속하는 경우가 많았다. 무더운 여름날 선풍기도 돌아가지 않는 작업장에서 노동자들은 흐르는 땀에 먼지가 덕지덕지 달라붙어도 불평 한마디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이때는 봉제업이 국내 활황산업이라 끼니 걱정은 덜 수 있었다.

하지만 봉제업이 사양세에 접어들면서 봉제노동자의 삶은 더 고달파졌다. 값싼 노동력으로 생산된 중국산 의류가 들어오면서 국내 봉제공장들은 하나둘 자취를 감췄다. 노동이 쌓여 숙련공이 될수록 설 자리를 찾기는 어려워졌다.

서른 중반이 되던 해부터 두 자녀를 혼자 키우게 된 희종씨는 한 장의 옷이라도 더 만들어 수입을 충당해야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일감이 없는 비수기는 길어졌고, 며칠간 아이들에게 라면만 끓여줘야 하는 날도 늘어났다.

반짝 찾아오는 성수기에는 비수기를 대비해 새벽까지 일해야 했다. 일감이 있을 때 바짝 벌어둬야 자녀들 학비를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희종씨는 새벽별을 보며 퇴근할 때 택시비가 아까워 1시간30분을 걸어다녔다고 한다. 그런 희종씨를 새벽마다 맞이한 것은 초등학생이던 둘째 아들이었다. 발을 동동 구르며 엄마가 오기만 기다리던 아들이 먼발치에서 눈에 들어올 때마다 희종씨는 쏟아지는 눈물을 애써 감춰야 했다.

90년대 후반부터 내리막을 걷던 봉제사업 때문에 봉제공들의 수입도 급격히 줄고 있다. 최근엔 성수기인 환절기에 최대한 일을 많이 해도 월 300만원 안팎으로 수입이 줄었다. 올해는 코로나19 사태까지 겹치면서 은희씨는 성수기에도 1주일 수입이 고작 3만원에 그친 때도 있었다. 다른 부업을 찾아보려 했지만 일감이 언제 들어올지 몰라 다른 일을 시작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한다.

일자리도, 수입도 줄어든 여공들에게 남은 것은 장기간 반복 작업으로 인한 직업병이다. 희종씨는 미싱을 돌릴 때 사용하지 않는 왼쪽 다리가 저려 밤잠을 설치는 날이 점점 늘어난다. 미싱을 돌리다 큰 바늘에 찔려 손가락이 부러지는 사고도 당했지만 치료는 모두 개인 몫이다. 은희씨는 30년 넘게 들이마신 먼지에 기관지가 상해 마른 기침을 달고 산다. 기침이 심해지면 뜬눈으로 밤을 지샌다.

하지만 이들은 지금도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봉제공장 대부분이 5인 미만 영세 사업장이라 근로기준법이 규정하는 근로수입을 보장받을 수 없다. 노동자가 5인 이상인데도 서류상 사업장을 2개로 쪼개는 곳도 비일비재하다. 4대 보험도 다른 나라 얘기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봉제노동자들은 정부의 각종 고용유지지원금이나 실업급여 수급 대상에도 오르지 못한다.

이 때문에 5인 미만 사업장 가운데 어떤 곳이 위장 사업장인지를 명확히 가려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사업체 노동실태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18년 기준 5인 미만 사업장 소속 특수고용노동자들이 221만명이 넘지만 정작 위장 사업장을 가려낼 방법이 마땅치 않은 데다 정부 차원에서 면밀히 현장 실태를 조사한 사례도 찾기 힘들다.

게다가 봉제노동자들은 영세한 봉제 업체 사업주를 상대로 처우 개선을 주장하기도 쉽지 않다고 말한다. 사업주 역시 작업 현장에서 함께 옷을 만드는 ‘사업주 겸 봉제공’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50대 초반이 ‘막내’로 불릴 정도로 봉제업계의 고령화도 상당하다. 새로운 기술을 가르쳐줄 청년 대신 외국인 노동자가 그 자리를 채우고 있어 노동자들이 조직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힘든 구조다. 희종씨와 은희씨는 “그저 최소한의 인간다운 처우만을 바랄 뿐”이라고 했다.

김형탁 노회찬재단 사무총장은 “최근 불황이 계속되면서 영세한 공장끼리 일감 경쟁이 붙어 납품 단가가 점점 떨어지다보니 노동자 처우도 더욱 나빠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며 “이런 구조를 근본적으로 혁신하기 위해서는 봉제노동자공제회를 만들어 운영하는 등 다양한 탈출구 모색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글·사진=최지웅 기자 woong@kmib.co.kr

“플랫폼 노동자·특고… 전태일 시절 ‘시다’처럼 열악한 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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