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시온을 만드는 사람들


‘처음’이 설렘과 함께 시작된다면, ‘마지막’은 돌아봄이라는 성찰적 감상에 빠져들게 만든다. 행여 일기장에나 쓸 이야기들로 공적 지면을 낭비한 것은 아닌지, 2년 남짓의 연재를 마치며 그동안 쓴 ‘시온의 소리’ 칼럼 내용을 찬찬히 다시 읽어보았다. 그러고 나서야 뒤늦게 깨달았다. 아, 나는 왜 정작 ‘시온’에 대해서는 묵상을 하지 않았지? 이 꼭지의 제목이 ‘시온의 소리’인데 말이다. 하여, 뒤늦게 생각해보는 ‘시온’ 이야기이다.

우선 시온산 혹은 시온성이 거룩한 공간으로 상징성을 갖게 된 시초는 다윗에게 있다. 다윗 이전에 예루살렘 성은 이스라엘에 속해 있지 않았으니까. 여부스 족속의 땅 예루살렘 성을 점령해 다윗이 왕궁을 세우고 그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완성하면서 ‘거룩한 산 시온성’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 전통이 시작됐다. 수천 년을 떠돌던 민족이 드디어 정착할 땅을 얻고 더 나아가 예배드릴 수 있는 공적 공간을 번듯하게 가지게 됐으니 그 감격이 얼마나 컸을까. 더구나 바벨론 포로기 이후 시온을 잃고 디아스포라(흩어진) 유대인의 삶을 살아간 이들이고 보니, ‘시온’은 그야말로 이름만 들어도 울컥하는 고향이요 성소였을 것이다.

성서에서 ‘시온’은 구심력과 원심력을 모두 갖는 공간으로 선포된다. 문서예언자들의 본문이나 시편 기자들의 찬양 속에서 모두 발견되는 바, 여호와의 법도는 비단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적용되는 가르침이 아니다. 시온에서 흘러나오는 여호와의 복음은 ‘결국’ 만방으로 흘러 사람들의 사는 방식을 전적으로 바꿀 것이다. 하여 만방이 여호와를 사모하며 시온으로 모여들 것이다. ‘흘러나오고’ ‘모여드는’ 중심에 시온이 있다. 이사야도 노래했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사 2:2~5)

하지만 시온성에서 흘러나오고 만방을 그곳으로 모으는 여호와의 법도는 결코 오늘날 한 민족의 정치 이념인 시오니즘과 동의어가 아니다. 여호와의 법도는 구체적 장소나 민족을 뛰어넘어 만인에게, 아니 우주 전 생명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 민족국가로서 이스라엘의 회복이나, 특수한 민족주의적 사상으로 전 인류를 복속시키는 것은 결코 ‘시온의 소리’일 리가 없다. 그건 ‘영적 이스라엘’이라는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영적으로 ‘야곱 족속’이기 위해 달려가는 시온은 성지순례 길에 오르는 예루살렘의 작은 언덕이 아니다. 이를 대체할 다른 기독교적 장소를 만든다고 해서 그 특수한 공간만이 배타적으로 성소일 리 없다. 우리는 오직 “여호와의 빛에 행하는” 것으로 시온 백성이 될 수 있다. 결국 시온은 여호와의 법도를 알고 믿는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거다. 자기 삶의 자리에서 칼과 창을 쳐서 보습과 낫을 만드는 평화의 삶을 살아내려 애쓸 때, 그 자리가 시온이 되는 거다. 그러니 이제는 살아내고 살려내자. 우리 자리에서 ‘시온의 소리’를 외치자.

백소영(강남대 기독교학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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