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 같은 스펙터클한 연출에 담은 재난서사

‘대구미술관’ 조덕현 작가 개인전

조덕현 작가의 초대형 신작 ‘플래쉬포워드’. 서양 미술사의 주요 장면과 한국 현대사의 주요 인물을 병치함으로써 상상의 재난서사를 만들어낸다. 대구미술관 제공

전시장에 들어서면 대각선 방향으로 가로놓인 거대한 캔버스의 뒷모습이 시선을 압도한다. 어두운 조명 탓에 극장에 들어선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벽면에는 아주 작은 사진들이 집중 조명을 받은 채 걸려 있어 우선 그쪽으로 발길을 향하게 된다. 강을 찍은 일제강점기 유리 건판 사진을 차용한 작품이다. 그러다 몸을 돌려 캔버스 정면으로 돌아선 순간 눈앞에 펼쳐진 온갖 재난 장면에 넋을 잃게 된다. 예기치 않았던 것인 만큼 감동이 증폭된다.

격동의 근현대사를 살았던 가상의 영화배우를 주인공으로 한 연작을 잇달아 발표해온 조덕현(63) 작가가 이번에는 극장을 방불하는 스펙터클한 연출로 재난서사를 풀어냈다. 대구 수성구 대구미술관에서 갖고 있는 이인성미술상 수상전 ‘조덕현: 그대에게’에서다. 대구 출신의 근대기 서양화가 이인성을 기리기 위해 대구시가 중견작가를 선정해 주는 이 상을 지난해 받았다.

회고전을 겸하는 이번 전시에서 조 작가는 과거 개인전에서 선보였던 작품을 극적 연출을 통해 재가공하는 노련미를 보였다. 거대한 캔버스에는 동서고금의 온갖 재난 장면이 작가의 트레이드마크인 흑백 드로잉으로 실감 나게 묘사돼 있다. 생존을 위해 고투하는 장면들이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심정에 호소하는 측면이 있다. 맞은편에는 PKM갤러리 개인전에서 선보인 ‘에픽 상하이’를 배치해 시각적 조화를 꾀했다. 각 전시 공간마다 대작 한 점, 혹은 두 점만 배치하는 등 극도의 절제미를 통해 극적인 느낌을 배가시켰다.

극적 효과는 점증하며 신작 ‘플래쉬포워드’에서 최고조를 이룬다. 120호짜리 대형 캔버스 15개를 이어 붙인, 가로 길이 10m에 달하는 초대형 신작 회화다. 서양미술사의 고전을 패러디해 당대의 문제를 건드리고자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폼페이 화산 폭발, 카인과 아벨 등 서양미술사 고전에서 가져온 장면뿐 아니라 아프가니스탄 ‘국경 없는 의사회’ 병원 폭격 장면, 홍콩 시위와 뉴욕의 인종차별 시위 등 동시대의 장면이 뒤섞여 있다. 엄청난 크기, 바로크적 장엄함, 낭만주의적 비극성이 혼합돼 한껏 감정을 고양시킨다. 흑백과 칼라 장면을 절묘하게 섞은 것도 효과를 높이는 요소다.

하지만 스펙터클한 감동 이후의 여운으론 이어지지 못한다. 예수의 제자 대신 신성일, 최은희, 문희, 최무룡 등 1960년대 스타 배우를 앉힌 것이나 대구의 화가 이인성이 들어가 있는 장면 등은 연결성이 약하다. 재난 서사로 읽히기에는 팬데믹 이후를 성찰하는 계기를 약화시키는 것 같다.

‘에픽상하이’ 설치 전경. 대구미술관 제공

그래서 더 주목하게 되는 것은 조용히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신작 소품 사진들이다. 작가는 낙동강 최상류 지천으로 경북 봉화에서 발원하는 내성천 주변 풍경을 찍었다. 이래에는 데칼코마니처럼 반전시킨 모습을 추가해 강에 풍경이 반영된 것 같은 효과를 냈다. 흑백으로 인화한 사진에는 6·25전쟁 당시의 군인, 피난 소녀 등 다른 시공간에서 재난을 겪은 사람들의 모습을 합성했다. 내성천 주변 칡넝쿨을 찍어 흑백 프린트를 하고 붓 터치를 가미해 수묵화 같은 효과를 내기도 했다.

작가는 내성천의 모래에 주목했다. 내성천의 모래는 수 천 년 퇴적된 것으로 깊은 곳은 땅속 20미터까지도 모래다. 그 자체가 천연의 필터다. 가장 가까운 시기에 겪었던 민족적 재난인 한국전쟁의 기억과 생태적 전망을 내성천 사진을 통해 동시에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전쟁 와중인 1952년 대구의 청과물 시장에서 사과를 팔러 나온 아낙들을 찍은 기록사진을 칼라 그림으로 재해석한 작품에선 재난을 이겨내려는 에너지가 느껴진다.

내성천 모래로는 거대한 모래 기둥을 만들기도 했다. 전시는 마지막까지 극적이다. 내년 1월 17일까지.

대구=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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