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시사 > 전체기사

“내가 암!” 알게 되자… “왜? 내가” 앓게 되다

[커버스토리] 암보다 더 고통스러운 ‘마음앓이’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스물아홉 어느 날, 나는 암 환자가 됐다.”

유튜브 채널 ‘만자일기’를 운영하는 임현준(28)씨는 지난 4월 대장암 4기 진단을 받았다. 심한 변비와 몸살 증세로 병원을 찾았다가 급히 수술대에 올랐다. 의사는 큰 종양을 제거했지만 이미 복막에 암의 씨앗이 퍼져 완치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했다.

하지만 ‘만자일기’는 여느 브이로그 채널처럼 평범한 일상을 기록한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내리곤 스테이크와 샐러드를 만들어 먹는다. 자신이 운영하는 술집에서 칵테일을 만들 땐 장난스러운 춤을 곁들인다. 커피를 마시는 와중에도 가슴팍에 연결돼 있는 항암제의 모습, 즐기던 술·담배를 끊었다는 언급에야 임씨가 환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긍정적이고 담담해 보이는 임씨에게도 암은 큰일이었다. 만자일기 채널에는 처음 병을 통보받았던 순간의 대화가 올라와 있다. 의사는 “(치료를) 해봐야 아니 빨리 시작하자”면서도 “완치가 힘든 상황인 건 맞다”고 했다. 긴 설명 중간중간 짧은 대답과 질문만이 임씨의 몫이었다. 임씨는 “암이라니 실감이 나질 않았다”며 “일을 계속할 수 있느냐는 질문부터 나갔다”고 회상했다.

본격적으로 치료가 시작되자 몸과 마음 모두 한층 힘들어졌다. 2~3주에 한 번씩 주사하는 항암제의 영향이 컸다. 항암치료 직후엔 온몸에 힘이 빠져 하루 종일 잠만 자거나 가게를 직원들에게 맡긴 채 쉬어야 했다. 억울한 마음도 컸다. 임씨는 “암센터 대기석에 앉으면 주변에 또래는 나 혼자뿐”이라며 “어르신들의 의아한 시선이 느껴진다”고 했다. 가족에게 기대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뜻밖의 도움은 휴대폰과 컴퓨터 스크린을 통해 찾아왔다. 투병 사실을 SNS로 알리자 응원·격려가 쏟아졌다. 다른 암 환우들이었다. 그들이 스스로의 투병기를 웹툰이나 영상으로 만드는 모습을 보며 ‘나도 해보자’고 결심했다. 대학에서 영상디자인을 전공한 경험을 살리기로 했다. 임씨는 “더 늦으면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컸다”고 설명했다.

채널 이름은 20대 암 환자를 다룬 웹툰 원작의 웹드라마 ‘아만자’에서 따왔다. 위암 4기 판정을 받고 덤덤하게 투병하는 주인공과 자신의 상황이 겹쳐 보였다. 특히 기억에 남은 것은 인생을 영화에 빗댄 대목이었다. 임씨는 “‘영화를 보면서 몇 분 남았나 확인하지 않는 것처럼 인생도 그냥 지금을 사는 것’이라는 대사에 공감했다”고 말했다.


드라마 ‘아만자’의 주인공 박동영은 수많은 환자가 암을 직면하며 겪는 심리적 변화를 보여준다. 현실을 부정하다가 분노하고, 후회와 우울감을 거쳐 마지막엔 병을 받아들인다. 이는 매년 20만여명이 겪는 과정이다. 2017년 한 해 동안 23만2255명의 암 환자가 새로 발생했다. 과거 암을 경험했거나 현재 투병 중인 환자는 지난해 174만명에 달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이 83세의 기대수명까지 생존할 경우 암에 걸릴 확률은 35.5%였다.

실제로 암 환자들은 투병 과정에서 불안, 우울, 적응장애 등 심리적 고통을 호소한다. 원자력병원 암환자정신건강센터에 따르면 전체 암 환자 중 47%가량이 분명한 정신과적 증상을 보인다. 지속적 스트레스로 개인의 일상이나 직업·사회적 생활 기능이 현저히 떨어지는 ‘적응장애’가 이 가운데 68%에 달한다. 13%는 극심한 우울증을 보인다.

암 환자의 정신건강은 단순히 개인의 심리적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전홍진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심한 우울감과 스트레스 때문에 치료를 적극적으로 받지 않는 경우가 많고, 실제 병의 진행도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보호자들의 정신건강 역시 위험하다. 환자의 병이 진행함에 따라 가족들의 정신 증상이 나타나는 빈도도 높아진다. 불안, 우울, 수면장애, 소외감 등이 일반적이다.


환자의 정신건강 상태가 암을 이겨낸 뒤의 장기적 생존에 영향을 준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우울증이 ‘암 생존자’의 사망 위험을 증가시킨다는 것이다. 서울대병원 고아령 교수팀은 2004년부터 2009년까지 암을 진단받은 뒤 5년 이상 생존한 1만1065명을 추적 관찰한 결과 우울증을 겪었던 암 환자의 사망률이 그렇지 않은 환자보다 52% 높았다고 발표했다.

전문가들은 개별 의료기관 차원에서 제공되는 환자·보호자 정신건강 지원 프로그램을 확대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국립암센터는 환자와 가족들을 위해 정신건강클리닉을 별도로 운영하고 있다. 암 환자의 불면증을 개선하기 위해 인지행동치료, 스트레스 관리 프로그램 등을 진행한다. 명지병원 암통합치유센터도 암 극복을 위한 정신건강 치료를 진행하고 있다.

지역사회에 설치된 정신건강복지센터의 관리 대상자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제안도 나왔다. 서울대병원 고아령 교수는 “암으로부터 완치된 생존자들도 주기적인 추적을 통해 유사시엔 집중상담이나 정신과 진료로 연계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병을 부정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소통·교류하는 것도 정신건강 회복에 좋은 방법이다. 임현준씨는 “유튜브를 통해 내 상황을 당당히 드러내면서 자존감이 높아졌다”며 “시청자들이 영상을 보고 ‘인생의 소중함을 느꼈다’며 감사 인사를 할 때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이미 상당수 중증·희귀난치성 질환자들이 임씨처럼 SNS를 통해 투병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유튜버 ‘삐루빼로’는 운동신경세포가 퇴화하며 점차 전신을 움직일 수 없게 되는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일상을 영상으로 보여주고 있다. 23세에 직장암 3기 판정을 받은 유튜버 ‘학이 사는 세상’도 일상과 항암치료 후기 등을 나누며 다른 환자들에게 힘이 되고 있다.

송경모 최예슬 기자 ssong@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