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는 시대다] 현대사 꿰뚫는 스토리·감각적 영상… “본방사수” 귀가행렬

<15> ‘모래시계’

‘모래시계’(1995)는 개국초기의 SBS가 MBC ‘여명의 눈동자’(1991) 송지나 작가와 김종학 연출을 모셔와 만든 야심 찬 기획이다. 주 4회 방영으로 6주간 시청자를 사로잡았는데, 서울 지역 평균 시청률은 46%였고, 최종회는 64%를 넘겼다. ‘모래시계’는 1970~80년대를 배경으로 굵직한 서사를 펼쳐놓는다. 강렬한 개성의 세 주인공 태수(최민수), 혜린(고현정), 우석(박상원)이 얽혀드는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감각적인 영상과 장중한 음악도 격을 높였다.

왼쪽부터 우석(박상원), 혜린(고현정), 태수(최민수)의 모습. SBS 제공

첫 회에 머플러가 휘날리는 와중에 살짝 넋을 놓은 태수 엄마(김영애)가 기차에 치이는 장면이나 바다와 노을이 환상적인 정동진에서 혜린이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체포되는 장면은 잊을 수 없다. 대사의 힘도 상당하다. “이렇게 하면 널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넌 내 여자니까” “나 떨고 있니?” 등은 지금도 패러디된다.

배우들의 호연도 한몫하였다. 터프한 박태수와 혼연일체를 이루는 최민수, 당당하고 고혹적인 고현정, 상식적인 검사에 딱 맞는 박상원, 과묵한 남자의 순애보를 보여준 이정재, 시크한 매력의 이승연은 지금 보아도 멋지고 세련되다.

광주의 진실을 폭로하다

‘모래시계’가 대중의 뇌리에 각인된 이유는 광주민주화운동을 재현한 최초의 대중문화 콘텐츠라서다. 1980년 당시 신군부 세력은 지역 봉쇄와 언론통제로 광주의 진실을 은폐했으며, 전두환 정권 내내 광주에 대한 언급은 금기시되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찍은 기록물이 대학가나 재야단체를 통해 유통되었다. 진실을 접한 사람들은 분노했다. 저항의 에너지들이 축적되어가다 마침내 1987년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직선제 선거는 노태우 당선으로 허무하게 끝났지만, 국회에서는 광주 청문회가 열릴 수 있었다. 피해자 증언이 방송되면서 광주민주화운동은 비로소 공식적인 사건이 되었다.

그러나 뉴스를 챙겨보지 않는 사람들은 1995년에도 15년 전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몰랐다. 들어서 알더라도, 눈앞에서 재현물을 보는 것은 전혀 느낌이 달랐다. 광주 시민의 자발적인 참여로 찍은 대규모 군중 장면은 시청자에게 충격을 안겼다. 1980년 당시 현장이었던 도로와 광주기독병원 등이 그대로 화면에 나왔다. 김종학 연출은 당시 기록사진을 삽입하는 방식으로 사실감을 높였다.

7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까지의 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SBS 드라마 ‘모래시계’(1995)는 시청률 64%를 넘기며 역사적인 작품으로 기록됐다. 특히 광주 민주화운동을 재현한 최초의 대중문화 콘텐츠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SBS 제공

본래 드라마는 힘이 세다. 단순히 광경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인물을 통해 감정을 이입시킬 수 있어서다. 계엄군으로 광주에 온 우석이 시민군이 된 태수를 향해 날아가는 총알을 막는 장면은 가장 극적이다. 태수는 후배를 찾아 광주에 내려왔다가 광주의 참상을 보게 된다. 태수는 후배를 말리지만 “국민한테 총을 쏘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후배와 더불어 시민군에 합류한다.

후배가 총에 맞아 죽자 어머니(김을동)는 태수에게 “광주 사람들의 말은 밖에서 믿지 않으니 외지인인 네가 살아 나가서 알려 달라”고 말한다. 한편 계엄군에 차출되어 광주에 투입된 우석은 이후 학살에 가담했다는 죄의식으로 검사가 될 수 없다는 자괴감에 시달린다.

‘모래시계’ 이후 광주민주화운동을 재현한 콘텐츠들이 나왔지만, 시민군에 합류한 외지인과 강제로 투입된 계엄군의 시선으로 빚은 ‘모래시계’의 구도를 획기적으로 뛰어넘는 콘텐츠는 한동안 없었다. ‘꽃잎’(1996)은 무고한 희생자, ‘박하사탕’(1999)은 계엄군, ‘오래된 정원’(2006)은 도망치는 외부인의 시선을 취했다. 2007년 ‘화려한 휴가’에 와서야 현지인 시민군의 시선이 등장한다. 이후 ‘스카우트’ ‘슈퍼맨이었던 사나이’ ‘26년’에서 외부인, 희생자, 후손의 관점으로 뒷걸음질 치다 2017년 ‘택시운전사’에서는 다시 영문을 모르는 외부인의 시선으로 후퇴해버린다.

2019년 다큐멘터리 ‘김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시민군을 저항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응시가 이루어진다. 이는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사회적 반동이 변천해온 역사를 반영한다. 요컨대 사건 발발 15년 만에 만들어진 ‘모래시계’의 출발이 나쁘지 않았음에도 사회적 논의가 광주 청문회 이전으로 회귀하는 수세와 반동을 겪으며 우회하다가 이제 겨우 현지에서 총을 든 시민군의 관점에서 저항의 역사를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후일담 문학 아닌, 저널리즘적 드라마

드라마는 광주민주화운동뿐 아니라 70~80년대의 굵직한 현대사를 꿰뚫는다. 동일방직사건, YH 사건, 부마 민주항쟁, 서울역 회군, 삼청교육대 등이 스며있다. 첫 회에 태수가 육군사관학교에 면접을 보지만, 얼굴도 알지 못하는 아버지의 빨치산 전력으로 거부당하는 장면은 연좌제의 존재를 보여준다. 학생운동으로 체포된 혜린이 고문에 못 이겨 자백하고 동료들 사이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혀 폐인처럼 유폐되는 모습은 독재정권의 폭압과 엄혹한 시대의 상흔을 느끼게 해준다.

극의 핵심갈등은 정치권으로 흘러든 카지노 및 슬롯머신 자금을 둘러싼 암투이다.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은 혜린은 비자금을 폭로하려 하고, 우석은 이를 수사한다. 이는 ‘박철언 슬롯머신 사건’을 직접 가리킨다. 강우석 검사의 실제 모델이 홍준표이고, 막후 악역으로 등장하는 강동환(김병기) 안기부실장의 실제 모델이 박철언이라는 점도 쉽게 짐작된다. 1994년 홍준표 검사는 ‘6공의 황태자’로 불렸던 박철언을 구속하며, 조폭의 자금줄인 슬롯머신 업계가 노태우 정권과 어떤 유착 관계를 맺고 있는지 폭로하였다.

이처럼 ‘모래시계’는 단지 1980년대 투쟁을 회고하는 후일담 문학이 아니다. 군사독재를 청산하려는 김영삼 정권 초기의 시대정신과 고발정신이 담겨있는 저널리즘적 드라마였다. 드라마는 당시의 한계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암시했다. 이권의 말단에서 범죄를 저지른 태수는 사형을 선고받지만, 몸통에 해당하는 권력자들은 중형을 피해간다. 드라마는 최종회에서 노태우가 취임식에서 전두환과 악수하는 기록영상을 삽입한다. ‘미완의 개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다음이 문제다, 그러고 난 다음에 어떻게 사는지가 중요하다”는 우석의 마지막 내레이션과 태수에게 사형을 구형하는 논고 등에는 드라마의 주제가 함축되어 있다. 즉 역사는 진행 중이며, 주체는 상식적인 선택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용서해도 죄는 용서할 수 없다”는 우석의 말이 주문처럼 가닿았던 것일까. 드라마가 방영된 지 10개월만인 1995년 11월에 전두환과 노태우는 나란히 재판정에 섰다.

시대를 앞선 여성들

SBS 제공

‘모래시계’에는 매력적인 여성들이 등장한다. 혜린은 강단 있고 주체적이다. 당시 드라마 속 부잣집 딸이 정략결혼의 대상자이거나 순진한 아가씨로 그려졌던 것과 달리, 혜린은 자신의 삶을 산다. 후일담 문학은 한창이었지만, 운동권 여대생이 드라마에 등장한 것은 처음이다. 집을 나와 학생운동에 투신한 혜린은 여러 번 체포되지만, 번번이 아버지의 뇌물로 풀려난다. 계급적 자괴감을 느끼는 혜린의 모습이 오래 기억된다. 혜린은 연애에도 적극적이다. 건달인 태수와 불같은 연애에 휩싸인 뒤, 결혼할 사람이라며 집에 소개한다. 혜린은 태수를 살리기 위해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는데, 엄연히 오빠가 있음에도 후계자로 지목된 것은 그의 강인함을 아버지가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사업을 물려받은 혜린은 젊은 여자라고 무시하는 주주들에게 정치권에 뇌물을 바치는 더러운 짓을 하지 않겠노라 밝히고, 재판정에서 정치권의 비리를 폭로한다. 1990년대 드라마에 이처럼 용감하고 담대한 여성 주체가 그려졌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신영진(이승연) 기자도 흥미롭다. 신영진은 “검사와 기자는 밥과 숟가락 같은 사이”라며 우석에게 파트너십을 제안한다. 신영진은 우석에게 청혼하며 자신은 “남편보다 마누라가 필요한 사람”이라 말한다. 내조할 아내가 아니라, 기자로서 검사의 길을 지지하는 아내가 되겠다는 뜻이다. 그는 내조형 아내를 택한 우석의 결혼식장에 와서 신부 선영(조민수)에게 쿨하게 당부한다. 어쩌면 기분이 상할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둘은 우정적 관계를 맺는다. 우석이 정보기관에 끌려갔을 때, 선영은 신영진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혜린의 도움으로 쓴 폭로기사가 편집부에서 삭제되자, 신영진은 마을 신문사의 윤전기를 돌려 기사를 찍는다. 이때 선영은 윤전기 기사들을 위해 라면을 끓인다. 여성의 적을 여성으로 그리는 진부한 구도에서 벗어나 여성들끼리 믿고 돕는다. 이 얼마나 멋지고 쿨한 구도인가!

황진미 대중문화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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