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가 교도소에서 배운 것은 지정학이었다

[책과 길] 지정학의 힘 / 김동기 지음, 아카넷 / 360쪽, 1만8000원.

책 ‘지정학의 힘’은 바이든 행정부가 동아시아 전략을 수립하고 대북 정책 방향을 잡는 데 시간이 걸리겠지만 과거 오바마 정부 때와는 다를 것으로 전망한다. 그러면서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보다는 대통령을 포함한 미국 지배층의 전략적 지도가 어떻게 바뀔 것인가에 더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진은 지난해 6월 30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측으로 갔다가 다시 남측으로 내려오는 모습. 뉴시스

1923년 11월 ‘맥주홀 폭동’으로 수감된 아돌프 히틀러와 루돌프 헤스에게 한 신사가 찾아온다. 그 신사는 헤스의 대학 스승 카를 하우스호퍼였다. 하우스호퍼는 하루 약 3시간, 모두 8회에 걸쳐 그들에게 지정학(Geopolitics) 등에 대해 강의했다. 히틀러는 이 기간 나치즘의 주요 이론적 바탕이 되는 ‘레벤스라움(Lebensraum)’을 비롯한 지정학적 개념을 접한다.

프리드리히 라첼이 제시한 개념인 레벤스라움은 ‘국가와 민족의 생존과 발전에 필요한 공간 영역’을 뜻한다. 이는 하우스호퍼와 나치를 거치며 영토 팽창의 논거가 된다. 아이러니한 건 히틀러와 하우스호퍼 사이에 균열이 생기면서 나치가 몰락의 길로 접어든다는 점이다. 하우스호퍼에게 독일의 레벤스라움은 과거 독일 땅이면서 독일인의 피가 흐르는 동쪽을 의미했다. 반면 히틀러는 러시아와 그 위성국으로 봤다. 독·소 불가침 조약을 깨고,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동·서에 전선을 만든 나치는 결국 몰락한다.

땅과 바다의 대결


하우스호퍼는 책 ‘지정학의 힘’에 등장하는 지정학 개념과 이론을 정립한 이론가 중 한 명이다. 한때 ‘히틀러의 브레인’으로 불리며 나치 팽창을 뒷받침한 그는 장남이 히틀러 암살미수사건에 연루돼 총살당하는 아픔을 겪기도 한다. 영화 ‘작전명 발키리’가 소재로 한 슈타우펜베르크 주도의 히틀러 암살미수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하우스호퍼 자신도 종전 후 부인과 함께 독약을 마시고 자살한다. 히틀러의 마지막을 떠올리는 최후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나는 잊히고, 잊히고 싶다”였다고 한다.

‘지정학의 힘’은 지정학 성립에 기여한 이론가 및 전략가, 국가의 관점에서 지정학의 역사를 되짚어본다. 책에 소개된 지정학 이론가와 전략가들은 자신이 속한 국가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한 무형의 무기로 지정학 이론을 정립한다. 책의 부제 ‘시파워(Sea Power)와 랜드파워(Land Power)의 세계사’에서 알 수 있듯 이들의 밑바탕은 해상 지배자(시파워)와 육상 지배자(랜드파워)의 구분에서 시작한다.

책 맨 앞에 나온 미국의 알프레드 마한은 영국이 해상을 제패하면서 세계를 지배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책 두 권을 1890년대에 낸 후 유명 인사가 된다. 해군 차관에 이어 대통령에 오른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마한의 전략을 실현하며 바다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독일과 일본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

반면 영국의 핼퍼드 매킨더는 유라시아 대륙 최대 영토를 가진 러시아가 철도 네트워크로 촘촘히 연결될 것에 주목한 후 랜드파워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봤다. 매킨더는 지배적 랜드파워가 지배적 시파워를 발전시킬 것이라고 파악했다. 유라시아 북부와 중앙을 세계 정치의 중심 지역으로 간주했다. 이에 따라 1943년 발표한 논문에서 소련이 전쟁에서 이길 경우 지구상에서 가장 큰 랜드파워 국가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는 종전 후 시작된 냉전체제에서 소련 봉쇄의 정당성을 제공했다.

앞선 두 명과 달리 미국의 니콜라스 스파이크먼은 세계 정치 핵심을 유라시아 대륙의 해안 지역으로 꼽고 ‘림랜드(rimland·가장자리 땅)’라 불렀다. 림랜드에는 러시아 서쪽, 유럽 대륙, 북아프리카, 중국, 동아시아 등을 포함시켰다. 그는 “림랜드를 지배하는 자가 유라시아를 지배하고, 유라시아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말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소련에 대한 봉쇄정책이 주를 이룰 때는 매킨더의 이론이 주목을 받았으나 소련 몰락 후 중국이 부상한 후에는 스파이크먼이 새로 조명을 받고 있다.

책은 나치와의 연관성으로 인해 한때 용어 사용이 기피됐던 지정학을 다시 부활시킨 헨리 키신저, ‘그랜드 체스판’을 통해 미국 일극 체제를 분석한 후 ‘전략적 비전’에서 일극 체제 붕괴 후 미국의 새로운 역할을 주문한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등의 생각도 별도로 다룬다.

땅과 바다가 충돌하는 한반도

“강대국들이 자국의 이익을 확대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한 지정학의 흐름 속에서 한반도에 사는 이들의 의사는 자주 무시돼왔다. 지정학 개념 정립 초기부터 땅과 바다가 부딪치는 한반도의 중요성은 강조됐으나 한반도의 운명은 강대국의 종속 변수인 경우가 많았다. 영국 러시아 간 ‘그레이트 게임’이 한창이던 1885년 영국이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거한 사건은 잘 알려진 예다.

1904년 발발한 러일전쟁은 앞서 소개한 매킨더의 이론과 연결된다. 1891년 러시아가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착공하자 영국의 매킨더는 러시아가 강력한 랜드파워를 갖게 될 것을 우려했다. 비슷한 시기 일본은 빈 대학 교수였던 로렌츠 폰 슈타인로부터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일본 안보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경고를 듣는다. 참모 본부장을 지낸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슈타인을 만난 자리에서 철도 건설로 러시아가 대규모 해군을 조선 등에 전개할 수 있다는 우려를 들은 것이다. 이후 아리토모는 총리대신이 되고,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인식한다. 결과적으로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한반도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친 셈이다.

일본의 항복 시기는 한반도 분단과 포개진다. 책은 고시로 유키코 일본대 교수의 논문과 책을 인용해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항복 타이밍을 조절하면서 한반도 분단을 유도했다고 설명한다. 중국 주둔 100만 병력을 만주로 옮기지 않아 소련 침략을 용이하게 한 점, ‘소련군이 1리를 전진하면 일본군은 2리를 퇴각하라’고 명령한 점, 핵폭탄 투하가 있긴 했지만 항복 시점이 소련군의 침공이 시작된 지 30시간 만에 이뤄진 점 등이 근거로 제시된다. 일본이 항복 시점을 늦춘 것은 동아시아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커져야 종전 후 미국이 일본의 역할을 인정할 것으로 내다봤기 때문이다.

저자는 결론 부분에 분단을 바라보는 주변국의 최근 지정학적 입장을 설명하며 분단 문제가 복잡하게 꼬인 고차 방정식임을 보여준다. 저자는 강대국들의 세력 관계에 균형이 이뤄지도록 하고, 남북한이 지정학적 목표를 공유해 공동 행보를 취할 필요가 있다는 휴 화이트 호주 국립대교수의 조언을 제시한다. 강대국이 짠 지정학의 구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역사적 경험을 반추하고, 빈틈을 찾아 전략적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저자 김동기는 국제정치 등 관련 분야의 전문 연구자는 아니다. 하지만 관련 분야에 대한 폭넓은 독서와 인용으로 지정학을 중심에 둔 강대국의 역사 속 ‘큰 그림’을 보여준다. 지정학을 키워드로 한 입문서로도 활용할 수 있을 듯싶다. 얽히고설킨 한반도 문제에 똑 부러지는 해답을 기대하기보단 오늘의 세계를 만든 강대국과 현재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국의 속내를 생각해볼 수 있게 하는 책이다.

김현길 기자 hg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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