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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효인·박혜진의 읽는 사이] 손택과 공생한 시대와 예술과 연인들

수전 손택: 영혼과 매혹, 다니엘 슈라이버 지음, 글항아리, 500쪽, 2만5000원.

‘수전 손택 : 영혼과 매혹’은 다니엘 슈라이버가 손택 사후 처음 쓴 평전이다. 손택의 일대기 중 분기점에 따라 연대기적으로 그리고 있다. 손택은 남편과 맺은 ‘공생관계’ 속에서 지적이면서 개인적인 대화를 누렸으나 “여러 삶을 살고 싶다”는 이유로 관계를 정리한다. 글항아리 제공

끝을 오래 생각할수록 더 잘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지난 관계에 대한 애도의 나날이 길어지고 있다는 말을 곱씹어 보았다. 이것은 서효인 시인이 지난주에 작성한 글의 마지막 문장을 조금 변형한 것이다. 이별의 유효 기간에 대해서라면 빨리 잊어버리라거나 뒤돌아보지 말라는 말에 더 익숙한 편이다.

나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헤어나지 못하고 질척거리는 게 이별한 마음의 미련한 바이브라는 건 연애학개론 머리말에서 숱하게 들었던 말이니까.

하지만 사랑과 이별이 부분적인 상황에 붙여진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인정하고 나면 끝을 오래 생각하는 것이 그다지 미련한 일도, 불행한 일도, 따라서 벗어나야 할 일도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끝이라는 상황에서 시작을 읽는 식으로 대단한 희망을 품을 것까지야 없지만 필요 이상으로 절망할 필요도 없다. 그게 무슨 일이든, 절망하는 것보단 정신 나간 희망이 낫기도 하고.

사랑에 있어서 실패란 무엇일까. 누군가에게 그것은 헤어짐의 다른 말일 테다. 이별이 사랑의 반대말이라는 데 이견을 달 사람을 없을 테고 사랑과 이별은 우리가 아는 가장 보편적인 대립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별을 실패의 동의어라고 말해야 할 것 같지만 차마 그렇게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별에는 모종의 실패가 포함되어 있지만 이별이 곧 실패는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은 마음이 내게는 있고, 이건 지난 내 이별의 역사를 미화하기 위한 말장난이 아니다.

사랑이나 이별은 두 사람의 세계 안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감정 중 가장 가시적인 상태에 붙여진 이름에 불과하다. 이 역시 지난 내 사랑의 역사를 축소하기 위한 말장난이 아닌데, 다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사랑과 이별은 연인들이 경험하는 가장 일반적인 두 상태. 그러니까 둘은 성공과 실패가 아니라 우리가 가장 잘 아는, 연인들에게 존재하는 감정의 거점이라고.

정영수의 소설을 읽으며 우리는 사랑과 이별 사이에 존재하는 숱한, 이름 붙일 수 없는, 따라서 편들 수도 편들지 않을 수도 없는 감정의 관찰자가 된다. 나는 이런 중립 상태에 이르는 게 좋아서 정영수의 소설을 읽는다. 친구들과의 대화 속에 있다면 누군가를 더 지지하거나 더 비난하는 데 열을 올리겠지만 혼자 그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누구도, 예켄대 불륜으로 범주화되는 사랑에 대해서도 그저 잠자코 읽게 된다. 무엇도 판단하지 않는다. 연인이란 두 사람이 교환하는 모든 감정을 이르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사랑과 이별만이 아니라.


수전 손택 평전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득달같이 주문했다.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손택의 스타일에 스스로를 얼마간 투영하고 싶어 하는 비평가이기 때문이다. 이따금 내가 동경하는 그의 삶 한가운데에는 손택이 맺은 다종다양한 인간관계가 있다. 중요 분기점을 기준 삼아 그의 삶을 연대순으로 정리한 이 평전에서 1949년에서 1957까지 해당하는 시간을 기록한 ‘지성의 광란’에는 손택이 남편 리프와의 결혼생활을 두고 샴쌍둥이의 결혼이라고 표현한 장면이 나온다. 그에 따르면 두 사람은 ‘공생관계’ 안에서 지적이고도 개인적인 대화를 누렸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할 것처럼 보였다.

훗날 왜 리프와 이혼했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손택은 “여러 삶을 살고” 싶었지만 남편과의 공생관계에서는 그게 불가능해 보였다고 말했다. 한 사람과의 공생관계를 끝낸 손택은 이후 더 많은, 다양한 공생관계를 경험하게 된다. 이른바 ‘수전 손택 프로젝트’를 한마디로 표현해야 한다면 ‘연인’으로 표상되는 수많은 공생관계의 역사라고 말하고 싶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과, 시대와, 예술 작품과 연인 상태로 존재했다.

고체, 액체, 기체. 물질은 존재 상태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연인은 공생관계로 존재할 때의 인간을 부르는 이름이다. 정영수의 소설에서 연인이 모든 감정을 포함하는 이름인 것처럼 손택의 삶에서 연인은 함께 존재하는 인간 상태를 부르는 이름이다. 각각의 유효 기간에는 관심 없다. 그때마다 얼마나 열렬히 서로에게 연인이고자 했는지, 그 공생의 의지만이 내게는 의미 있다.

박혜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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