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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문샷’보단 ‘룬샷’ 하자

신준섭 경제부 기자


경제를 기사로 다루면서 아무리 자문해봐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왜 한국에서는 페이스북이 나오지 않을까’라는 질문에 답이 잘 안 보인다. 한국은 스위스 국제경영대학원(IMD)이 매년 발표하는 국가경쟁력 순위에서 올해 23위를 했다. 지난해보다 5계단이나 급상승했다. 디지털 경쟁력은 무려 세계 8위다. 그런데도 산업 현장을 둘러보면 기성 기업인 대기업의 ‘경쟁력’만 눈에 들어온다. 생경한 아이디어를 사업화해 퀀텀 점프를 하면서 올라서는 벤처기업은 씨가 마르다시피 했다.

미래세대를 그려보면 의문이 더 커진다. 끊임없이 불타오르는 교육열은 한국 사회에 순도 높은 교육 주기를 구축했다. 한국의 아이들은 어린이집부터 고등학교까지 정규 교육과 함께 각종 학원에 얽매여 산다. 유학은 기본이다. 교육만 놓고 보면 세계를 주름잡는 새로운 회사가 수십 개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그럼에도 한국이 미래 먹거리를 찾아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열변은 사라진 적이 없다. 뭔가 앞뒤가 안 맞는다.

정답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물리학자이면서 바이오테크 기업을 창업한 사피 바칼의 책을 접했다. 그가 써내려간 ‘많으면 달라진다’는 활자에 반론하기가 힘들었다. 흔히 우리는 뛰어난 아이디어는 스타트업과 같은 벤처기업 구성원에게서나 나온다고 믿는다. 대기업에 다니는 인재들은 보수적으로 행동한다는 또 다른 믿음이 전제로 깔렸다. 하지만 바칼은 조직 구조가 차이를 만들어낸다고 지적한다. 대기업 직원도 불안정한 스타트업으로 자리를 옮기면 과격할 정도의 아이디어를 내놓는다는 것이다.

‘라이온 킹’으로 9억52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며 잘나가던 디즈니가 침체한 것도 사람이 바뀌어서가 아니었다. 가진 게 많아지면서 더 이상 모험을 하지 않으려는 윗선의 관성이 성패를 갈랐다. 한국 사회도 많아서 달라지는 함정에 빠져 있는 건 아닐까.

바칼은 이 함정을 벗어나기 위해 ‘룬샷(Loonshot)’과 이를 수용하는 ‘구조’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룬샷이란 다들 무시하고 홀대하는 소위 미친 아이디어를 말한다. 역사를 바꿔 온 아이디어는 자세히 뜯어보면 룬샷인 경우가 많다. 제2차 세계대전 판도를 바꾼 레이더가 대표적이다. 레이더라는 듣도 보도 못한 아이디어가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미국 군부의 기득권들은 손사래를 쳤다. 검증되지도 않은 기술을 개발하는 데 예산을 낭비할 수 없다는 논리를 들이밀었다. 10년간 썩혀두던 이 룬샷 아이디어는 버나바 부시라는 인물 덕에 현실로 구현됐다. 부시가 이곳저곳을 설득해가며 레이더 개발을 밀어붙였다. 룬샷이 나오고 이를 대접해주는 구조가 형성된 덕분에 미국은 강대국 반열에 올라섰다.

한국 사회 곳곳에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룬샷이 숨어 있을 수 있다. 다만 이를 받쳐주는 구조가 구축되지 않다 보니 룬샷이 눈에 띄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탈출구가 보인다. 이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그 첫발을 내디디려면 지난해 기준 162개국 중 144위인 ‘노동유연성’부터 제고해야 한다. 문재인정부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전면에 내걸고 출범했다. 덕분에 노동자의 고용 안정성은 높아졌다. 다만 이로 인해 부작용도 나타났다. 한국의 노동자는 어렵게 혁신하기보다 안정에 치우치고자 하는 인식이 강해졌다. 같은 돈 받는데 누구는 일하고 누구는 노는 조직이라면 곱씹어 볼 얘기다.

정부가 해고를 쉽게 하도록 방조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룬샷 아이디어가 개화할 수 있도록 자극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재임 시절 “노동유연성 확보는 후순위”라고 했던 김동연 전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조차 지금은 노동유연성에 찬성한다고 말한다. 가세가 기우는데도 노사 간 집안 싸움만 하고 있는 몇몇 기업을 보면 노동유연성은 더욱 절실해 보인다.

관료의 의식도 바뀌어야 한다. 산업 현장에서 새 아이디어가 튀어나오면 규제를 논한다. 기존 규제의 틀로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고 있는 이들이 공격받으면 더하다. 택시업계와 대립하다 규제 철퇴를 맞은 ‘타다’가 대표적이다. 사업 다 망한 다음에 규제 풀겠다고 나서는 건 소용이 없다. 아마 ‘한국형 뉴딜’과 같은 ‘문샷’(Moonshot·달에 우주선을 보내는 것처럼 중요한 결과가 나올 것 같은 야심찬 목표)에 익숙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정부에 감히 말해 본다. 이제는 룬샷하자.

신준섭 경제부 기자 sman32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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