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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용 목사의 ‘복음 설교’] 이웃을 향한 헤세드

룻기 1장 6~18절


구약 성경에 나타난 헤세드는 총 246번 쓰였는데 이 용례는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헤세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헤세드, 우리가 이웃을 향한 헤세드이다. 이 중에 이웃을 향한 헤세드를 보인 모습이 본문의 며느리들을 향한 나오미의 권고이다.(8절)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나오미가 모압 땅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두 며느리에게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기를 원한다”고 마음을 전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선대(善待)’가 헤세드이다.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이 왜 나오미가 베푸는 헤세드인가. 사실 나오미는 며느리가 없으면 살길이 없다. 양식도 구할 수 없고 일도 할 수 없으며, 다시 결혼할 수 있는 나이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기보다 며느리들을 먼저 생각한다. 아직 젊으니 다시 시집을 가서 가정을 누리라고 떠나보내는 것이다.

이것은 나오미가, 자신은 고향에 가면 하나님이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절망의 끝자락 속에서 그들을 가여히 여기는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다. 함께하면 같이 죽게 될 것이 불을 보듯 훤하므로, 그들만이라도 살리려는 몸짓이다.

왜냐하면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오는 여정 중에도, 그리고 도착해서도 하나님에 대한 기대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나오미(기쁜 자)라고 부르지 말고 마라(괴로움)로 불러 달라 했으며, 떠날 때는 풍족히 떠났었다(21절)고 하는 말도 사실이 아니다. 그녀는 기근으로 떠났었다. 무슨 말인가. 사실을 왜곡해 가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다.

‘하나님이 나를 괴롭게 했다. 하나님이 나를 비어 돌아오게 했다. 나를 징벌했다. 나를 괴롭혔다.’ 그녀는 하나님을 향한 부정의 말을 쏟아내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불신앙을 가진 나오미를 하나님이 축복했다는 것인가.

아니다. 지금 이 나오미의 발언은 불신앙이 아니다. 불신앙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괴롭게 했다’고 말을 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인정하는 행위이다. 그녀는 지금 하나님을 불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상처받은 마음으로 하나님께 신음을 내는 것이다.

믿음의 여정 속에 찾아오는 회의나 의심은 ‘믿음의 또 다른 국면’이다. 신앙이 없으면 의심도 없고 원망도 하지 않는다. 아예 하나님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다. 진정한 불신자는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하나님이 있는 것이 말이 안 돼’라고 말하지 않는다.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자가 불신자이다.

내가 믿음의 길을 걷고 있다가 깊은 신앙의 회의에 빠져 있다면 그것을 너무 힘들어할 필요가 없다. 그때가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는 기회이다. 그것이 나오미의 신앙 상태이고 나오미에게 접근하신 하나님의 방법이다.

나오미가 며느리에게 하나님의 헤세드를 베풀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그저 며느리가 보여준 헤세드가 고마워서 그것을 돌려주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의 성숙 여부와 그다지 상관없다. 그것이 사람 사는 도리이기에 행한 것뿐이다.

우리 신자가 가져야 할 헤세드의 삶은 그렇게 큰 결단과 용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평범한 일상 속에서 내가 받아온 사랑을, 은혜를 기억하는 수준이면 충분히 헤세드의 통로가 될 수 있다.

나오미처럼 그냥 상식을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신자가 상식에 맞는 선으로만 살아도 잘했다고 칭찬하실 것이다. 믿음의 결단, 이런 것보다 하나님을 인지하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헤세드가 나를 통하여 흐르게 될 것이다.

(미국 버지니아 한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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