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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주의 알뜻 말뜻] 충분과 고요


‘레이크스 미술관의 이 여인이/ 세심하게 화폭에 옮겨진 고요와 집중 속에서/ 단지에서 그릇으로 하루 또 하루 우유를 따르는 한/ 세상은 종말을 맞을 자격이 없다.’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유고시집에 수록된 짧은 시다. 나는 아직 가보지 못했지만, 레이크스 미술관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이다. 레이크스 미술관에서 단지에서 그릇으로 하루 또 하루 우유를 따르는 여인이라니, 대체 누구일까? ‘베르메르’라는 시 제목에 힌트가 있다.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아하, 시인이 보고 있는 그림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눈앞에 그림이 떠오른다. 노란 윗옷에 푸른색 앞치마를 둘렀던가? 머리에 흰 수건을 둘러 둥글고 순한 이마를 내놓고 있지 아마? 소박한 농가 부엌, 한쪽 벽에는 빛이 들어오는 창이 있고 그이는 창가에 서서 우유를 따르고 있을 것이다. 하루 또 하루 우유를 따르느라(하루도 쉴 새 없이 일을 하느라) 팔뚝에는 노동자의 근육이 붙어 있을 것이고. 베르메르의 작품 중에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미술책에서 누구나 한 번쯤은 보았을 그 여인, ‘우유를 따르는 여인(The milkmaid)’이다.

월동을 위해 베란다에 있던 화초들을 거실로 들여놓고 그 옆에 앉아 책을 본다. 하필 쉼보르스카와 베르메르가 떠오른 건 어쩌면 당연한 의식의 흐름이었을 것이다. 남서향 집이라 오후엔 집안에 길게 해가 든다. 화초 잎이 비스듬한 겨울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난다. 푸르고 투명하다. 읽고 싶은 책들을 꺼내 거실 바닥에 몇 권 쌓아놓는다. 따끈하게 데운 우유 한 잔에 주전부리 한 줌 곁들인다. 마음에 드는 문장을 만나면 연필로 밑줄을 긋는다. 부드럽고 순정한 연필이 너그러운 종이와 만나는 소리. 상쾌하고 고요하다. 이때의 고요는 아무것도 없이 텅 빈 적막이 아니라 가득 찬 충분이다. 살아생전 마지막 시집 제목을 ‘충분하다’라고 정해놓은 ‘쉼’보르스카가 떠오른 건 이 때문일 게다. 고요의 화가 베르메르가 떠오른 것도.

이런 충분과 고요를 위해서라면 시간을 쪼개고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농담 같지만, 내일 할 수 있는 일을 오늘 미리 하지 말자는 모토를 섬길 수 있어야 한다. 오후에 드는 햇살을 누리기 위해 저녁으로 일을 미뤄야 하고, 방금 펼쳐든 책에 빠지기 위해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다 초치기의 달인이 되는 걸 감수해야 한다. 충분하다는 말은 ‘가득 차다(充)’와 ‘나누다(分)’로 이뤄져 있다. 그러니까 나누어도 가득 차 있는 것이 충분한 것이다. 나누지 않아서 가득 찬 것이 아니라, 나누어야 완전한 것.

그것이 비단 내가 가진 시간을 나누어 충분의 시간을 만끽하는 일뿐이겠는가? 정의의 이름으로 권력을 휘두르고 국민의 이름으로 국민을 배신하는 권력자들과 정치인들을 보며, 다시 쉼보르스카를 읽는다. 돈과 권력을 충분히 가진 당신들은 왜 고요하지 않은가? 충분과 고요를 모르는 사람들. 이 겨울, 당신들의 죄를 묻고 싶다.

카피라이터·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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