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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용 목사의 ‘복음 설교’] 율법을 넘어선 은혜

룻기 2장 1~9절


본문은 나오미와 룻이 모압을 떠나 베들레헴에 막 도착했을 때의 상황이다. 룻이 시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보아스의 밭에 들어가 이삭을 주웠다. 이것으로 양식을 삼기 위함이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추수할 때 경제적으로 어려운 자들을 위해, 이삭을 모두 다 베지 않고 한 모퉁이를 남겨두었다. 이는 양식이 부족한 자들이 추후에 눈치를 보지 않고 거두게 하려는 배려였고, 이 남겨진 이삭은 누구나 주울 수 있었다. 이것은 율법에 근거해 가난한 자들에게 보장된 제도였다.(신 24장)

이삭을 줍고 있던 룻을 본 보아스는 이삭을 줍는 여인 룻이 이방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파격적으로 그녀를 보호하고 배려한다. 그녀를 딸이라 부르고, 다른 밭에 가지 말라고 하며 물을 함께 마실 수 있도록 돕는다. 그 이유는 그녀가 시어머니를 홀로 모시고 사는 가련한 처지에 놓인 과부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헤세드다. 지금 보아스는 율법에 명시돼 있는 내용을 넘어선 은혜를 베풀고 있는 것이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족쇄처럼 묶어 두려는 제도가 아니다. 율법이 존재하는 이유는 이 율법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과 뜻과 생각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원하시는 이 땅의 삶의 방향과 태도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은혜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을 ‘지키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율법을 ‘세우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이제는 더 이상 율법이 필요 없어’라고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다.(마 5:17) 왜냐하면 율법은 그것을 지키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과 뜻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헤세드가 율법을 넘어선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는 우리의 상식과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고 해석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하셨다. 이것은 전혀 상식적이지 않다. 도무지 이해도 안 되고 해석도 안 된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순종한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성실히 지키고자 하는 아브라함의 헤세드로 인하여 이삭은 제물로 바쳐진다. 그 모습 속에서 앞으로 오실 예수님의 십자가 모형이 완성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에 가듯,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갈보리 산으로 올라갔다. 이삭이 등에 자기를 제물로 태울 장작을 스스로 짊어지고 모리아 산으로 가듯, 예수님은 자신의 등에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 산으로 갔다.

모리아 산에서 이삭이 자기가 지고 간 장작더미 위에 결박당하듯, 갈보리 산에서 예수님은 자기가 지고 간 십자가 위에 결박당했다. 그리고 이삭을 죽이려 할 때 하나님께서 살려 놓듯이,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부활시키셨다.

이 모리아 산이 현재의 골고다 언덕, 갈보리 산이다. 같은 산이다. 번제로 바쳐졌던 그 자리에서 2000년이 지난 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고 약속하신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얻는 은혜로 완성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헤세드이다.

보아스는 룻에게 율법의 수준을 넘어선 은혜를 베푼다. 그것은 바로 율법의 정신을 완성하신 예수님의 헤세드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요 신자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다함 없는 사랑이다.

(미국 버지니아 한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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