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오피니언 > 칼럼 > 너섬情談

[너섬情談] 소에게 미안하다

황교익 (칼럼니스트)


소는 가축이다. 가축이란 인간 생활에 유용해 일정 공간에 가두어 키우는 짐승이다. 소는 용도에 따라 일소, 고기소, 젖소 등으로 나뉜다. 인도에 있는 소는 이 분류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인간의 공간에 있기는 한데 사육을 하지 않는다. 고기나 젖을 얻지도 일을 부리지도 않는다. 그래서 가축으로 볼 수 없다. 쥐가 집안에 있다 해도 가축이라 하지 않는 것과 같다.

한반도의 소는 일소였다. 물론 우리 조상도 소를 잡아 고기를 먹고 젖을 짜기는 했지만 소의 주요 용도는 논밭을 갈고 짐을 나르는 데에 있었다. 한 음식 전문가는 한우에 대해 이런 농담을 던져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한우는 요즘으로 치자면 포클레인이지. 우리는 포클레인을 먹는 거야.”

한반도의 소가 일소일 때에는 식구 대접을 받았다. 큰 일꾼이었다. 그래도 인간은 아니니 생구(生口)라 했다. 정월 대보름이면 오곡밥과 나물로 상을 차려서 주었다. 한 해 농사 잘 지어보자고 식구로서 격려하는 음식이었다. 일을 부릴 때에는 다그치거나 욕을 하지 않았다. 소가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다고 여겼다. 겨울이 오면 덕석을 짜 등에 올려주고 “소에게 새 옷을 해주었다”고 했다.

한반도의 소 사육 역사는 2000년이나 된다. 그토록 오랫동안 우리 곁에서 생구로 살았던 소이지만 관련 유물은 매우 적다. 반면에 말 유물은 넘친다. 무덤에서 나오는 마구가 상당하다. 금장에, 비단에 화려한 무늬가 그려졌다. 도자기나 그림에 등장하는 말도 많다. 한반도에서 말이 소보다 더 유용한 것은 아니었다. 소와 말에 차별이 존재했던 것인데, 이는 가축 주인의 신분과 관련이 있다. 소는 피지배계급의 가축이고 말은 지배계급의 가축이다.

조선 정부를 보면, 소를 소중한 자원으로 여기기는 했다. 함부로 잡지 못하게 관리를 했다. 그런데 소의 주인인 농민은 신분이 낮았다. 농민은 문자를 몰라 자신의 소에 대해 글을 남기지 못했다. 그림을 그릴 줄 몰라 소 그림도 그리지 못했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도 지묵을 마련할 돈이 없었을 것이다. 말은 달랐다. 농민에게는 필요 없는 가축이나 왕과 장수에게는 긴요했다. 전쟁에 나아가면 말을 타고 달렸다. 외출을 할 때에도 위세를 높이기 위해 말을 탔다. 주인처럼 말의 몸에 비단을 두르고 금장의 마구를 채웠다. 짚으로 짠 덕석이나 걸치는 소와 달랐다. 주인이 그림과 시문에도 올려주었다. 말은 말의 주인처럼, 소는 소의 주인처럼 대접을 받았다. 가축의 운명이다.

1960년대 한반도는 산업화의 물결을 맞았다. 말은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야 한다는 시대였다. 자신이 직접 서울로 향할 수 없었던 농민은 자식을 앞세웠다. 서울의 대학은 농촌에서 올라온 유학생으로 채워졌다. 농민은 소를 팔아 자식 학비를 대었다. 대학을 우골탑이라 했다.

소 판 돈으로 공부한 농민의 자식은 도시 노동자가 됐고, 이들에 의해 쇠고기 시장이 커졌다. 상업 축산의 시대가 열렸다. 송아지를 사서 고기소로 키웠다. 영농 기계화로 소는 더 이상 논밭을 갈지 않게 됐다. 농민이 부리는 일소로서의 가치는 사라지고 도시인이 요구하는 고기소로서의 가치가 부각됐다. 한반도의 소가 한우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이즈음의 일이다. 일소 농우의 시대는 가고 고기소 한우의 시대가 온 것이다.

한반도의 소가 한우라는 이름을 갖게 되면서 농우일 때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농우일 때에는 농민의 자식이 산에서 베어다주는 풀을 먹었는데 한우가 되고 나서는 주인이 살에다 지방을 채운다고 소화도 안 되는 곡물 사료를 먹인다. 농우는 15년에서 길게는 30년은 살았는데 한우는 30개월 조금 넘으면 도축된다. 소의 주인은 신분이 나아진 듯도 한데 소의 사정은 예전만 못하다. 소의 해라고 소의 미덕을 말하려 했는데 시대가 그렇지 못하다. 소에게 미안타.

황교익 (칼럼니스트)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국민일보 신문구독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