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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포럼] 만기친람 ‘보모 국가’의 명암

박재완 (성균관대 명예교수·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


새해가 밝았다. 올해부터 달라지는 제도를 훑어보니 정부 입김이 한층 거세질 전망이다. 정부가 보호·지원·육성한다거나 민간활동을 제한하고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 일색이다. 자연스레 공무원이 늘고 세금이 오르며 이런저런 법령과 기구도 신설된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도 그 하나다.

이런 흐름에는 국정지표의 하나로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를 내건 현 정부의 철학이 녹아 있다. 개인 삶에 국가가 관심과 애정을 갖는 건 바람직하다. 하지만 책임까지 지겠다면 지나치다. 쓸데없는 간섭과 엉뚱한 훈수가 쏟아져 민간 자율이 주눅들 수 있다. 존 케네디 35대 미국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국가가 당신에게 무엇을 해줄지 묻지 말고, 당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지 물어라”라고 주문했다.

매사에 정부가 나서는 만기친람(萬機親覽)은 민간의 창의와 활력을 떨어뜨리고 도전과 혁신을 위축시킨다. 반짝 효과만 있을 뿐 길게 보면 성장을 저해한다. 오스트리아 경제학파의 태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1944년 출간된 명저 ‘예종(隸從)으로의 길’에서 그런 ‘보모(保母) 국가’의 위험을 경고했다. 반세기 전까지는 북한에 뒤졌던 우리 경제력이 지금은 북한의 53배로 커진 주요인은 정부와 민간의 차이다. 북한은 정부가 일일이 통제했고 남한에선 민간 자율이 존중됐다. 싱가포르 경영대 하오량 교수 등의 2020년 연구도 곱씹을 만하다. 중국 기업인 가운데 1960년 이전 출생자의 성향은 마오쩌둥, 이후 세대는 덩샤오핑의 노선에 각각 가까웠는데, 후자가 이끈 기업의 성장률이 전자보다 높았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의 2016년 보고서도 흥미롭다. 미국에서 동아시아계는 학부까진 공부를 잘하지만 대학원 과정 이후엔 딱히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다. 유학 시절 필자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공식에 익숙한 덕분에 수학 교과의 전반부엔 앞서갔는데 창의력이 긴요한 후반부로 갈수록 힘에 부쳤다. 부모의 기대와 독려에 따른 억지 공부가 호기심과 탐구열에 기초한 자율학습을 이길 수 없다는 방증이다.

자율과 강제의 차이는 집값 대책의 방향도 시사한다. 지난해 8월 호주 중앙은행은 고도와 용적률 제한을 풀어야 시드니 등 대도시의 치솟는 아파트값이 안정될 것으로 분석했다. 또 지난해 10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펴낸 보고서 ‘주거의 미래: 정책 시나리오’는 가중되는 주거난 해결을 위해 임대료 규제 완화를 제안했다. 무자비한 시장의 자율보다 착한 정부의 강제가 주거 안정에 더 효과적이라며 온갖 규제를 도입한 우리 여권이 새겨들을 대목이다.

물론 원천적 약자를 비롯한 취약계층은 정부가 도와야 한다. 다만 복지 목표는 수혜자의 자활이지, 마냥 수혜자 수를 늘리는 게 아니다. 일할 수 있는 사람이면 재기와 자립의 기틀을 다져줘야 한다. 물고기 자체보다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는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ALMP)’이 우선이다. 나랏돈으로 정부가 만드는 일자리는 연명용 산소마스크에 불과하다. 설탕을 섭취하면 당장은 활기를 찾더라도 체질은 오히려 더 나빠지는 ‘슈거 러시’와 다름없다. 아쉽게도 우리는 OECD에서 ALMP는 하위권인데, 정부의 직접 일자리 창출은 선두권이다.

보모 국가는 전체주의와 포퓰리즘의 산물이며 그 기반은 대중의 활발한 정치 참여다. 국가사회주의를 표방한 나치당이 그 표본이다. 독일 키엘세계경제연구소는 1900~2018년 포퓰리스트 지도자 50인을 뽑아 그들 보모 정권의 경제 성과를 비교 분석했다. 처음엔 선전한 예도 있지만 막상 15년이 지나니 그들은 정상적 정권에 비해 1인당 국민소득이 10% 넘게 뒤졌다. 장담했던 분배조차 나아지지 않았다.

21세기에 들어선 그리스와 베네수엘라 경제가 표심에 영합한 무분별한 복지로 거덜이 났다.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는 경제난에 분노한 민심을 업고 2010년 재집권했으나 사적연금 몰수 등 반시장 정책을 쏟아내 경제가 되레 수렁에 빠졌다. 미 기업연구소 달리보르 로핵에 따르면 헝가리 사례는 대중의 정치 열기가 미지근한 라트비아 등 발트 3국과 대비된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어려워진 세 나라는 헝가리와 달리 급여 삭감과 공직자 감원 등 쓴 약을 감내해 경제를 빠르게 되살렸다. 정치 참여를 제한하자는 뜻이 아니다. 보모 국가와 슈거 러시의 감언이설에 유권자가 현혹되지 않도록 전문가 검증과 숙의가 활성화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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