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용 목사의 ‘복음 설교’] 하나님의 헤세드가 임할 때 (2)

룻기 3장 1~11절


룻은 시어머니인 나오미의 지시를 받아 술에 취해 잠들어 있는 보아스에게 다가가 곁에 눕는다. 이 행동은 충분히 부적절한 행위이다. 그런데 오히려 잠에서 깬 보아스는 룻에게 ‘현숙한 여인’이라 부르며 이를 룻이 베푼 헤세드(인애)라고 얘기한다. 도대체 어떤 상황이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보아스가 룻을 ‘내 딸아’라고 부르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는 보아스가 룻보다 나이가 꽤 많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룻은 충분히 젊은 사람에게 시집을 갈 수도 있다. 하지만 보아스에게 다가온 것은 오로지 시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함이다. 보아스는 이를 보았고 룻이 죽은 남편의 집안을 위해 하는 행동을 보고 기특하게 여긴 것이다. 사실 룻은 그럴 의무가 없다. 시어머니를 봉양할 필요도 없고, 죽은 남편의 가족과 자신은 아무 상관이 없다.

더욱이 룻은 유대인도 아닌 이방인이다. 자신은 아직 젊기에 다시 시집을 갈 수도 있다. 그런데도 시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 이것이 헤세드다. 굳이 책임질 필요가 없는데, 사랑과 자비를 베풀 아무런 이유가 없는데, 스스로 자진해 그 사랑을 베푸는 것이 헤세드다. 이미 깨어진 계약임에도 스스로 한 약속을 변함없이 지켜 가는 것, 그것이 바로 헤세드다.

보아스는 이러한 룻의 모습에 감동해 그녀를 향해 ‘현숙한 여인’이요, 헤세드(인애)를 베푸는 자라고 말한 것이다.(10절) 그런데 이 구절에서 더 중요한 문장이 있다. 그것은 ‘네가 베푼 헤세드(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다’는 말이다. 처음 보인 헤세드는 무엇인가. 그것은 남편이 죽어서 계약관계가 깨졌는데도 시어머니를 따라온 것이다.

그렇다면 나중에 보인 헤세드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이 이 결혼을 통하여 깨어진 계약 관계를 회복하려는 모습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준 헤세드이다. 우리는 우리의 죄로 하나님과 단절됐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계약을 깬 것은 우리였다.(렘 31:32)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홀로 그 언약을 지켜가신다. 우리의 상태와 모습과 상관없이 우리를 지키고 돌본다. 그리고 그 깨진 언약을 다시 이루기 위해 이 땅에 내려와 자기 목숨을 내놓고 십자가를 지셨다. 이 모습이 바로 처음 보인 헤세드보다 더 강력히 임하는 나중의 헤세드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하나님은 나의 모습과 상관없이 영원토록 나를 지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혼자 강력한 은혜로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를 돌보고 지키며, 처음보다 더 강력한 나중의 은혜로 우리를 회복시키신다.

이 사실이 마음에 안 오는가. 상관없다. 심지어 내 느낌과 감정과도 관계없이 하나님이 그 약속을 홀로 지켜나가시는 것, 그것이 복음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헤세드가 임한 것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의 눈이 떠져야 한다는 점이다. 느낌은 없어도 된다. 하지만 영적인 눈은 떠야 한다. 동일한 헤세드가 임할 때 이것을 깨닫고 보는 자는 누리게 될 것이고, 모르는 자는 항상 서운한 마음으로 살게 된다.

하나님의 헤세드가 임할 때 행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다.(18절, 새번역) 나오미와 룻이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 후에 한 일은 기다리는 것이었다.

굉장히 지루한 싸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이행하리라”라는 보아스의 말을 믿고 기다렸다. 그것이 우리 신자의 몫이다. 주께서 나를 결코 혼자 두지 않고 반드시 책임진다는 믿음, 그 믿음의 견고함이 우리를 살릴 것이다.

(미국 버지니아 한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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