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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그만 비장합시다

강준구 정치부 차장


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니고, 당면한 현실적 과제도 많다. 1987년 민주화 이후 34년, 한강의 기적이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으로 막을 내린 지 24년이 지났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 정치는 너무 비장하다. 보편의 정치를 말하는 목소리가 없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됐을 때 3김 시대가 막을 내린 것으로 봤다. 취임 첫해 문재인 대통령이 통합을 얘기할 때 비장한 정치사가 끝나고 근현대사의 두 번째 이야기가 시작될 것으로 기대했다. 한편에서 적폐청산을 고집할 때도, 환부만 도려내는 외과적 수술과 검경 수사권 조정 같은 제도적 마무리만 된다면 불공정 특권과 그 유착 구조가 해소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 후 4년, 우리는 오히려 비대해진 부작용들을 목격하고 있다. 새 시대를 열 것으로 기대했던 문 대통령에겐 노무현 전 대통령 비극의 그림자가 너무나 크게 드리웠다. 친박으로 끝일 것 같았던 극성 팬덤·계파 정치는 친문 깃발 아래 더욱 유난스러워졌다. 공정과 정의를 앞장서 말해야 할 의원들은 지지층이 만들어 놓은 울타리 안에 갇혔다. 이 선을 넘는다는 건 주군에 대한 불충이 됐다. 문 대통령은 말 그대로 주군이 됐다. 광화문 대통령을 말하며 시민 옆에 서겠다던 대통령은 너무 빨리 구중궁궐로 물러났다. 초대 국무총리와 비서실장을 직접 춘추관에서 발표했던 그는 어느 해외 순방 때 돌아오는 전용기 안에서 ‘국내 이슈’를 묻는 기자 질문을 끝으로 TV 안으로 사라졌다. ‘윤석열 사태’에서 보듯 친문 진영이 지지층만 바라보며 밀어붙이다 나라가 사분오열될 때쯤에야 대통령이 마지못해 나서는 상황이 반복된다.

정치가 팬덤에 갇히고, 보편의 정치가 사라지자 그 자리는 오래된 정치 문법이 채우고 있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새해 벽두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특별사면론을 꺼냈다. 마침내 거대 갈등 사회가 된 이 시점에서 누구나 국민 통합의 절실함에 공감할 수밖에 없겠으나 느닷없다는 게 문제였다. 남북 스포츠 단일팀을 보지 못한 20대가 평창 동계올림픽 아이스하키 단일팀에 불공정 이슈를 들고나오던 당시 여권의 패닉이 되풀이됐다. 국민을 설득하려는 노력은 이번에도 생략됐다. 성의 없이, 맥락 없이, 당위성만으로 카드를 던지는 오래된 정치다.

초등학생 조기 유학이 허용된 게 21년 전으로, 이들은 30대가 됐다. 신조어 ‘딸바보’가 언론에 처음 쓰인 게 2009년이니 이 딸들이 벌써 초등학교 6학년이다. IMF 구제금융이 24년 전, 글로벌 금융위기가 13년 전이어서 생계를 걱정하던 부모 밑에서 애가 닳았던 청년들은 직장인이 됐다. 지금 민주당의 열렬 지지층은 40대이며, 아래로 내려갈수록 지지율이 떨어져 20대에선 60대 다음으로 낮다.

정치가 낡고, 쓸데없이 비장하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문제로, 누가 빨갱이네 아니네를 가지고 아직도 싸우는 게 이 동네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밥벌이도 못 할 정도로 상대를 옥죄니 자업자득이겠으나, 점차 그 정도가 심해지고 있다. 사안을 합리적으로 따지는 대신 우선 상대방을 악인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악의가 가득하다. ‘100%의 악인’이란 없을진대 정치만 개입했다 하면 적폐요 독재요 하는 험악한 말들을 상대 면전에서 뱉어낸다.

올해 20대 대선 경선이 각 당에서 시작된다. 이번에는 보편의 정치를 말하는 후보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코로나19 이후 대전환이 시작되는 이때 정책적 영민함과 실리적 외교 감각을 갖춘 후보가 있으면 좋겠다. 나아가 적의보다 선의를, 신념보다 합리성을 우선시한다면 빨갱이여도,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지 않아도 그를 뽑을 생각이다.

강준구 정치부 차장 eye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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