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오피니언 > 칼럼 > 뉴스룸에서

[뉴스룸에서] 환상은 깨져야 한다

지호일 경제부 차장


“환상 속에 그대가 있다. 모든 것이 이제 다 무너지고 있어도 환상 속에 아직 그대가 있다….” 며칠 전 퇴근길에 들른 동네 편의점 매장 스피커에서 익숙한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 ‘환상속의 그대’. 서태지와아이들이다.

그날 오전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인터뷰 기사가 한 신문 지면에 실렸다. “장관으로서 대(對)검찰 관계에서 인사권, 수사지휘권, 감찰권을 통해 바람직한 민주적 통제를 행사했다는 것이다.” 검찰 개혁과 관련해 이뤄낸 중요 성과를 꼽아 달라는 질문에 내놓은 답변이다. 재임 1년 내내 법무부가 연출한 블랙코미디를 지켜본 눈이 몇 개인데 이런 자화자찬이라니. “개똥처럼 흔해졌다”(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조롱까지 들었던 해괴한 수사지휘권 발동이나 ‘정권 수사=좌천, 정권 추종=요직’이란 갈라치기 인사가 모두 검찰 개혁의 한 과정이었다는 말인가. 여권이 총동원됐던 ‘윤석열 죽이기’ 프로젝트는 올해가 되기 전 완패로 끝나지 않았던가.

“그대의 환상. 그대는 마음만 대단하다. 그 마음은 위험하다….” 새도 좌우 두 날개로 날듯이 검찰 개혁도 두 개의 축으로 지탱돼야 한다. 무소불위라는 검찰 권한 축소와 정치적 중립성·독립성 보장.

돌이켜보면 현 정부만큼 검찰을 앞세운 검찰정치를 원 없이 활용한 정권도 없지 싶다.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을 비롯한 권력자들에 이어 기존의 검찰 주류를 쳐내는 데도 검찰 수사를 동원했다. 작동 방식은 매번 비슷하다. 친여 성향 언론의 의혹 제기로 국민적 공분이 끓어오르면 대통령이 나서서 ‘적폐’ 딱지를 붙이고 검찰이 출동해 단죄하는 식이다. “공소시효 여부와 관계없이 수사하라”는 대통령의 하명 속에 수사 절차의 정당성 따위는 사소한 문제로 치부됐다. ‘적폐 청산’ 수사로 집권 전반기 국정 운영에 큰 동력을 공급하던 검찰은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악의 축 신세로 급전직하했다. 정부·여당은 기다렸다는 듯 검찰을 때려 집안을 결속하는 재료로 쓰고, 검찰을 향한 지지층의 오랜 분노를 에너지원으로 삼으려 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수사, 울산시장 선거 개입 수사, 월성 원전 1호기 관련 수사…. 이런 수사들을 검찰의 쿠데타요, 개혁을 저지하기 위한 반동으로 단정한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개가 주인을 무는 꼴”(이원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이란 평가는 개가 감히 물지 말아야 할 주인은 국민이 아니라 현 정권이란 말이었을까. 확실한 것은 여권이 검찰 개혁을 ‘조국 수호’와 동일시하고, 이를 다시 ‘윤석열 찍어내기’로 축소시키는 동안 검찰 개혁의 대의와 각론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는 점이다. 여전히 환상에서 깨지 못하는 이들에게만 보이지 않을 뿐. 여권 인사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드는 ‘선출된 권력’의 ‘민주적 통제’는 정치권력이 검찰 수사에 직접 개입해 수사 방향을 비틀거나, 수사 자체를 막아버리는 행태를 포장하기 위한 수사(修辭)였음이 반복된 사례를 통해 드러났다.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밝힌 대로 검찰 권한을 제한하는 법 제도적 개혁은 외형적 결과물이 나왔지만, 검찰의 정치적 독립을 무너뜨리는 데 몰두한 나쁜 선례의 폐해는 더욱 깊고 오래갈 수 있다.

여당은 검찰 개혁 시즌2를 천명하고 액션에 들어갔다. 검찰이 정권에게 더이상 이빨을 드러내는 일이 없도록, 혹여나 ‘선출된 권력’ 자리를 야당에 빼앗기는 일이 생겨도 탈이 없도록, 아예 검찰의 직접 수사권을 없애버리겠다는 태세다. 이런 식으로 개혁당한 검찰상은 정말 국민이 바랐던 모습일까. 집권 5년 차의 겨울, 개혁이라는 환상에 대한 불신과 의구심은 차곡차곡 쌓여간다.

지호일 경제부 차장 blue51@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국민일보 신문구독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