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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효인·박혜진의 읽는 사이] 책 운명 ‘판결’하는 베테랑 편집자의 세계

읽는 직업, 이은혜 지음, 마음산책, 232쪽, 1만4500원

책 ‘읽는 직업’ 머리말에 앞서 적힌 다음 문장은 편집자의 역할을 함축한다. “저자와 역자는 우선 편집자를 설득하려 하고, 편집자는 독자를 상상하며 그들의 욕구를 측정하려 한다.” 책 생태계의 유력한 삼각형의 일부분으로서 편집자를 그린 ‘읽는 직업’은 책의 운명을 주체적으로 결정하는 인간으로서의 편집자와 순응적 인간으로서의 편집자를 함께 그려낸다. 게티이미지뱅크

가까운 몇 년 동안 우리가 법정에서 쓰이는 용어에 관심을 가졌던 시기는 없었던 듯하다. 며칠 사이의 뉴스만 살펴보더라도 판결문, 양형기준, 파기환송심 같은 말이 숱하게 등장한다. 그간 정치의 영역에서 결정되고 해소되던 갈등 중 상당수가 법정의 영역으로 넘어오게 되면서 판사의 이름이 뉴스에 오르내리게 되고 판결에 따라 특정 진영의 공격 대상이 되는 일도 흔해졌다. 장관과 재벌 총수의 운명이 법정에서 가려지고 대통령의 탄핵도 결국 판사의 결정이 최종 결론이 된다.

이렇듯 우리는 모두 법의 지붕 아래에 산다. 법 아래에 누구나 평등하다고는 감히 말할 수 없겠지만, 갖가지 다른 모양의 지붕 아래에 사는 것은 맞다. 누군가에게 그 지붕은 반듯하고 높을 것이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낮고 허술할 수도 있다. 기실 판사의 판결로 결정되는 대부분의 사안은 앞서 열거한 권력자가 아닌, 법률 용어와는 좀체 관련이 없이 살았던 보통 사람의 삶에 더 가까이 있다. 가정폭력, 아동학대, 산업재해, 살인, 강간, 사기…. 평범한 사람이 피해자가 되고, 또 놀랍도록 평범해 보였던 사람이 가해자가 되는 사건들이다. 수천수만 건이 발생하고 수천수만 건의 재판이 일어나며 또 그만큼의 판결이 내려진다. 법의 지붕 아래에서, 지붕의 수호자들에 의해.

그 수호자의 가장 직관적인 직책은 판사일 것이다. ‘어떤 양형 이유’는 주로 형사재판을 맡아 온 박주영 판사의 법정 기록이다. 법정에서의 기록은 개인의 상념과 내면 또는 감상을 배제해야 마땅하겠으나 판결문 말미의 ‘양형 이유’에서는 조금이나마 그 숨통이 트인다. 보통 사람의 사건이고 그런 이유도 그들에게 치명적이고 결정적인 판결이 된 양형에 대한 글을 통해 저자는 판결문에서는 드러날 수 없는 인간의 구체적 양상을 되살린다. 그럴수록 저자는 깊은 절망에 빠진다. 법의 한계를 맞닥뜨리고 사회의 부조리에 분노한다. 그리고 연민과 애정 즉 사랑만이 법의 지붕을 고칠 수 있는 도구임을 말한다.

‘어떤 양형 이유’는 또한 직업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우리 삶에 이토록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직업으로서의 법관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별로 없었다. 판사 개개인이 가질 법한 인간적 고뇌와 사건을 대하는 마음은 애써 감춰야 할 대상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책에 의하면 판사는 판단하는 직업이 아닌 ‘쓰는 직업’일지도 모른다. 쓰기 위해서 읽어야 한다. 방대한 사건 자료를 읽고, 판결문을 쓰고 양형 이유를 작성한다. 그 읽고 씀에 각자의 삶이 담겼고, 그 삶의 모음은 우리 사회의 전부와 다름 아니다.


베테랑 편집자 이은혜의 저서 ‘읽는 직업’을 ‘쓰는 직업’을 다룬 ‘어떤 양형 이유’에 이어서 읽었다. 편집자는 최소한 원고에 대한 1심 판사 정도는 되는 듯하다. 경우에 따라 최종심 판결을 내리기도 한다. 1심 판결은 책을 출간할지, 출간하지 않을 것인지에 대한 결정이다. 최종심은 책을 절판할지 아닐지에 대한 결정일 테다. ‘읽는 직업’은 이렇듯 책의 운명을 주체적으로 결정하는 인간으로서의 편집자를 쓰는 동시에 책에 의해 운명이 결정된 순응적 인간으로서의 편집자도 그려 낸다. 주체적 인간과 순응적 인간은 ‘읽음’으로써 하나의 몸이 된다.

가난하면서도 위대한 작가들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한 책은 지난하면서도 노심초사하는 편집자에 대한 통찰로 나아가 이윽고 비범한 독자와 깊고 너른 책의 세계에까지 닿는다. 거기에는 책의 부제처럼 독자와 저자 그리고 편집자의 삶이 있다. 책의 생태계의 유력한 삼각형을 이루는 그들의 삶은, 때로 모두의 삶이 되기도 한다. 안정된 직속을 포기한 채 쓰기에 몰두하는 삶, 창조와 모방을 교차하며 기획에 힘쓰는 삶, 언제 읽을지 모르는 책을 서가에 채워두는 삶. 그런 삶들이 ‘읽는 직업’이 지탱하는 지붕 아래에 모여 있는 것이다.

같은 직업을 가진 자로서 그의 삶을 통과하는 동행에 마음을 다잡을 수밖에 없었다. 누구라도 직업에 대해 갖고 싶은 뜨거운 애정과 남다른 소명을 보았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일을 할 때 그러하고 싶은 일관적 태도와 이지적 사유를 읽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동시에 존립하기 어려운 덕목이 겸손한 방식으로 제자리에 있을 때, 그것을 발견하는 일은 쉽고 기쁘다. 책은 종종 이렇게나 쉬운 기쁨을 준다. 그 과정은 어렵고 괴로웠다 할지라도. 그 몫의 상당량이 편집자에게 있다 하더라도.

서효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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