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 매력 넘치는 예능 대세라지만… 본업은 골프 벤처 CEO”

[인터뷰 사이] ‘골프 여제’ 박세리

여러 개의 직함 가운데 ‘감독’이 제일 편하고 좋다는 박세리 도쿄올림픽 골프 여자 국가대표 감독. 그가 인터뷰에서 많이 쓴 말은 도전, 경험, 최고, 최선, 꿈, 성장, 존경 같은 단어들이었다. 방송을 앞둔 인공지능 골퍼와의 대결에 대해서도 “어려워 보이지만 그런 실험과 경험이 있어야 또 다른 발전이 있잖아요. 해보지 않으면 앞으로 나갈 수 없어요”라고 했다. 권현구 기자

촬영 중인 고정 TV 프로그램 3개, 스포츠 스타트업 공동 CEO, 골프 여자 국가대표 감독, 골프 해설위원, 청소년과 기업인 강연 요청이 끊이지 않는 인기 강사, 채널 2개를 운영하는 유튜버….

스스로를 ‘사회초년생’으로 부르는 박세리(44)는 ‘골프 여제’ 시절보다 더 바빠졌다. 지난해 봄 처음 인터뷰 의사를 타진했다가 다시 통화했을 때 두 달 후에나 일정이 가능하다는 답을 들었다. 어렵사리 연말로 약속을 잡았지만 결국 해를 넘겨서야 마주 앉게 됐다.

“거의 주7일 일하고 있어요. 제 회사를 시작하면서 일이 많아졌는데 방송이 계속 늘어서 정신이 없네요. 그래도 재미있어요. 선수 때 해보지 못했던 걸 해보고, 몰랐던 걸 배우고, 새로운 사람을 알아가는 것도 즐겁고요.”

-요즘 ‘예능 대세’로 활약이 대단해요.

“저는 운동만 했던 사람이니까 방송 흐름이나 분위기도 잘 모르고, 웃겨야 된다는 걸 생각해본 적도 없잖아요. 그런데도 좋아해주시는 게 저한테는 너무 낯설었어요. ‘어, 이상하네, 나는 선수 때랑 바뀐 게 없는데 왜 그럴까’ 했어요. 그동안 운동하던 박세리만 기억하던 분들이 의외의 모습이었다, 반전이었다는 말씀을 많이 하시더라고요.”

반전 매력, 맞다. 1998년 ‘맨발 투혼’의 US여자오픈 우승으로 애국가 영상에 등장하던 국민 영웅이 이제는 개그우먼 박나래가 붙여준 ‘리치언니’라는 친근한 별명으로 불린다. 럭셔리한 집에서 잠옷 차림으로 TV 삼매경에 빠진 일상을 공개하고, 2년째 다이어트 중이라면서 ‘계속 먹으면 소화된다’는 먹방계의 명언을 남기는가 하면, 장을 볼 때는 ‘모자란 것보다 남는 게 낫다’며 통 크고 손 큰 면모로 웃음을 선사한다.

-같이 출연한 분들이 과하게 행동하면 정색하는 장면들이 있어요. 본인의 페이스대로 자연스럽게 방송하는구나 싶었어요.

“일부러 뭘 꾸미거나 만들어내지 못해요. 운동선수 특유의 성격일 수도 있는데, 불편하면 불편하다고 할 말은 하는 자신감 있는 모습이 좋다고 하시는 분들도 많더라고요.”


-선수 시절 방송에서는 소리 내어 웃는 걸 본 적이 없는데 요즘에는 ‘으하하하’ 호탕한 웃음소리가 트레이드마크처럼 됐어요.

“아무래도 은퇴하고 나서 좀 부드러워진 게 있겠죠. 운동할 때는 늘 감정을 컨트롤하면서 집중해야 하니까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어요. 원래 저는 잘 웃고 눈물도 많은데 선수 시절에는 보여드릴 수 없었던 거죠.”

올해는 더 자주 TV에서 그를 보게 될 모양이다. 여성 운동선수들로만 이뤄진 예능으로 그가 맏언니처럼 프로그램을 이끌고 있는 ‘노는 언니’가 이어지고, 인공지능(AI) 골퍼와 골프 대결을 하는 특집 프로그램이 방송을 앞두고 있다. 박찬호 박지성과 함께하는 ‘쓰리박’도 촬영을 시작했고, ‘와일드 와일드 퀴즈’라는 새 예능에 고정 출연하게 된다. 그가 직접 기획해 지난 연말 1, 2회를 선보인 스포츠 오디션 프로그램 ‘내일은 영웅’도 본궤도에 오른다.

-현역 시절 98년 맥도날드 챔피언십에서 최연소 메이저대회 우승 기록을 세우며 미국 투어 데뷔 첫 승을 따냈어요. 2007년에는 역대 최연소이자 동양인 최초로 LPGA 명예의전당에 이름을 올렸고요. 그런데 한 번도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했어요.

“최고가 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지, 최고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요. 그랬으면 제가 너무 거만해지지 않았을까요? 내가 최고이기보다 최선을 다하는 내 모습이 최고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최선을 다했던 거고, 최선을 다하니까 좋은 기록을 세웠던 거고, 그래서 더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선수 시절 인터뷰를 보면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선수가 되겠다’는 말을 빼놓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국민들의 기대가 정말 엄청났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그건 제가 잘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대하시는 거라 어쩔 수 없었어요. 열심히 한 만큼 결과가 나오니까 저도 계속 욕심이 났고, 저 스스로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지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과부하가 왔죠. 그게 슬럼프가 됐고요.”

-박세리 선수 하면 떠오르는 건 트로피를 들고 있는 화려한 모습인데, 스스로는 영광보다 힘들었던 슬럼프에 대해 더 자주 말하는 것 같아요.

“보통 성공만 말하는 사람들이 많죠. 그런데 슬럼프가 없었으면 성공을 했다고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저도 슬럼프 때문에 많은 걸 배웠고 조금 더 성숙해졌어요. 저한테 슬럼프가 없었다면 지금도 부족하지만 더 많이 부족했겠죠. 그래서 꼭 이 얘기를 하거든요. 슬럼프라는 게 언제 어디서 어떻게 올지 모르지만 그 좌절과 실패가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요.”

그는 2004년부터 지독한 슬럼프를 겪었다. 1년 반 동안 단 1승도 거두지 못했고, 예선 탈락과 기권이 이어졌다. 잠을 줄여가며 훈련량을 늘렸지만 성적은 더 곤두박질쳤다. 손가락 부상으로 골프채를 내려놓고 휴식기를 가진 이후 2006년 맥도날드 챔피언십 우승으로 재기했다.


-슬럼프는 성공이 아닌 성장을 위한 것이었다, 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죠. 강연에서 이런 얘기들을 들려주나요.

“선수 생활을 하면서 갖고 있던 마인드, 슬럼프를 겪은 제 경험을 듣고 싶어 하세요. 인생에서 앞으로 또 어떤 슬럼프가 올지는 모르겠어요. 운동선수로서 가장 힘든 슬럼프를 겪어보니까 그럴 때는 ‘아, 한 번 뒤를 돌아보라는 거구나’ ‘다시 시작하라는 거구나’ 싶어요.”

-운동선수들에게 ‘연습 벌레’라는 말을 하는데, 스스로를 ‘연습 기계’라고 했었어요. 지금은 어때요, 진짜 노는 언니처럼 잘 놀고 잘 쉬고 있는 건가요.

“그것도 아직 못하고 있어요.”

-왜 그런가요.

“어떻게 쉬어야 잘 쉬는 건지, 내가 뭘 정말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정확히 몰라요. 골프 외에 모든 걸 차단하다 보니 제 인생의 기쁨이라는 건 성적이 좋았을 때고, 기쁘지 않은 날은 골프가 잘 안 됐을 때, 그렇게 나눠지더라고요. 취미를 가지라는데 뭘 해야 될지 몰랐어요. 다칠까봐 할 수 있는 것도 별로 없었고요. 은퇴해서 회사를 차리고 방송을 하면서 이제 알아가는 거예요. ‘이런 거 해보니까 재밌더라, 사람들 만나는 것도 참 즐거운 거구나.’ 그런데 즐거움이라는 게 정말 별거 아니더라고요. 여럿이 마음 편하게 웃고 속상했던 것도 눈물 흘리면서 수다로 털어놓는 게 힐링 아닐까 배워가고 있어요.”

-후배들한테 이미 충분히 열심히 하고 있으니, 조금 덜 열심히 해도 된다고 했었죠. 그게 꼭 어려운 시절을 지나는 우리 모두에게 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어요.

“물론 ‘다음’이라는 말을 할 수 있어요. ‘이번만 지나면, 그래, 이 대회만 잘 치르면 다음에 하면 되지.’ 하지만 제 얘기는 하고 싶은 걸 하면서도 충분히 잘할 수 있다는 거예요. 물론 그런 걸 다 참고 견뎠기 때문에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 아니냐고 하시면, 50%는 맞아요. 그런데 그게 100%는 아니라는 얘기죠.”

-후회나 아쉬움이 있나요.

“만약에 나 자신을 좀 더 아꼈으면 더 많은 기록을 세우지 않았을까 하는 거죠. 한국 선수들은 연습량이 너무 많아요. 외국 선수들처럼 삶의 밸런스를 맞춰가면 더 오래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을 거예요. 슬럼프가 부상 때문이거나 나태해지거나 거만해져서 오는 게 아니더라고요. 그걸 후배들이 덜 겪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죠.”

-스포츠 기업(바즈 인터내셔널) 운영도 시작했는데, 어떤가요.

“후배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더 나은 프로그램으로 안정적으로 훈련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우선 온라인 교육 콘텐츠를 개발하고, 교육과 훈련을 겸할 수 있는 아카데미도 구상하고 있어요. 저소득층 유소년 선수도 지원하면서 제가 지금까지 받은 사랑을 환원할 거예요.”


-올해는 어떤 활동을 계획하고 있나요.

“도쿄올림픽이 열리면 감독으로 참가하는 게 가장 중요한 일정이죠. 그런데 지금 상황으로는 어려운 선택 같고, 5년을 기다린 선수들을 생각하면 열리긴 해야 될 것 같고…. 코로나가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요.”

-전업 방송인으로 변신하는 건 아니죠.

“회사라는 본업이 따로 있으니까요. 본업에 충실하되 방송은 방송대로 또 최선을 다하면서 욕심 많은 사람으로 살아보려고요.”

-최종 목표는 역시 골프군요.

“그렇죠. 제가 꿈을 이루는 과정을 보고 자란 후배들이 자기 꿈을 이루고 있고, 그 꿈이 또 그다음 후배들의 꿈으로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그 꿈을 이룰 수 있게 후배들이 도움을 받으면서 운동할 수 있도록 회사를 키워나가는 게 가장 큰 목표예요.”

권혜숙 인터뷰전문기자 hskw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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