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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시론] 우리가 정인이를 죽였다

유장춘 (한동대 교수·상담심리사회복지학부)


정인이를 생각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정인이는 나에게 누구인가. 그 존재는 나와 어떻게 관계 맺고 연결되어 있나. 포항에서 양평까지 그 아기가 잠든 자리를 찾아 다녀오는 긴 시간 운전대를 잡고 있었지만 내 생각은 온통 그 질문을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그 아기는 이 시대의 아픔이고 고통이었다. 그는 16개월의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그의 존재는 이제 우리 사이에서 절대 작지 않다.

생각할수록 정인이는 예수를 닮았다. 아무런 죄없이 미움받고 학대를 받았다.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삶의 자리에서 변명 한마디 하지 않았다. 학대자를 향하여 한마디 미움을 표시하지도 않았다. 그냥 원망도 없이 고통받다가 무기력하게 죽었다. “그가 곤욕을 당하면서도 침묵을 지켰으니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양처럼 그의 입을 열지 않았다”고 했던 이사야의 말씀처럼 말없이 조용히 죽어갔다.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고독하고 힘들었을까.

정인이의 죽음은 이 시대의 악과 증오와 저주를 한 몸으로 담당한 희생의 죽음이었다. 오늘을 가리켜 혐오 사회라고 한 그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의 사회는 통제하기 어려운 광기와 폭력이 잠재해 있다가 어디선가 불쑥불쑥 튀어나오고 있다. 그의 죽음은 그 지독한 혐오의 폭력을 온몸으로 담당하면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왜 그토록 미워해야 하냐고 울부짖는 외침, 십자가 위에 예수님의 외침이었다. 왜 사랑하며 살지 못하느냐는 하나님의 말씀을 육체로 죽음으로 그래서 생명으로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다 길 잃은 양처럼 제각기 잘못된 길로 갔으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든 사람의 죄를 그에게 담당시키셨다”라는 말씀이 내게는 정인이를 두고 하신 예언처럼 들린다.

정인이를 죽이는데 앞장선 자들은 저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같은 기독교인들이었다. 목사의 아들과 목사의 딸 그들을 가르치고 양육한 기독교 학교와 교회, 회칠한 무덤과 같이 겉으로는 경건하지만 속으로는 탐욕과 이기적 욕망으로 썩은 내가 진동하는 오늘의 종교인들. 정직을 가르치나 스스로는 정직하지 않고, 사랑을 가르치나 자신들은 혐오의 독을 내뿜는 위선과 독선의 우리 기독교인들이 정인이를 죽였다.

결국 정인이를 죽인 자는 나였다. 내가 그 기독교인 아닌가. 내가 그들의 선생이 아닌가. 내가 그 목사 중의 하나가 아닌가. 정인이의 죽음 앞에 무릎을 꿇고 나는 용서를 구한다. 내가 말할 것은 분노가 아니다. 내가 말할 것은 위로가 아니다. 내가 말할 것은 징벌이나 엄벌이 아니다. 내가 말할 것은 변명이나 탄식 같은 것이 아니다. 무릎 꿇고 통곡하고 참회하며 용서를 구해야 한다. 내가 좀 더 온전한 삶을 살아내고 있지 못하기에 생긴 일이 아닌가. 나는 예수님께 참회의 기도를 드리듯이 정인이 앞에 참회의 기도를 올려야 한다. 주께서 말씀하신 바처럼 이 세대의 지극히 작은 자인 정인이 앞에서 한 것이 바로 예수께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가장 큰 죄악은 십자가를 헛되이 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한다. 정인이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아야 한다. 이제 그를 우리의 마음에서 살아가게 하기 위해 늘 다시 살려내야 한다. 정인이가 살아야 할 사랑의 삶을 우리의 삶으로 다시 살아내야 한다. 이 땅에 다시는 정인이처럼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아기가 없도록 서로 약속하고 경계하고 지켜내야만 한다. 용서와 사랑, 화해와 평화를 향해 생명을 바쳐야 한다. 그렇게 해서 폭력을 반대하고, 증오를 소멸시켜야 한다. 하나님은 정인이를 슬퍼하는 모든 사람을 그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는 새로운 소명을 향해 부르고 계신다.

유장춘 (한동대 교수·상담심리사회복지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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