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오피니언 > 칼럼 > 청사초롱

[청사초롱] 지상에 유배당한 존재들

이재무 시인·서울디지털대 교수


“자주 선원들은 심심풀이로 붙잡는다./ (중략)/ 조금 전까지도 멋있던 그는 얼마나 우습고 추해 보이는지/ 선원 하나가 담뱃대로 그의 부리를 성가시게 하고/ 절뚝거리며 다른 이는 더 이상 날지 못하는 불구자를 흉내 내는구나!// 시인은 폭풍우를 넘나들고 사수들을 비웃는/ 이 구름 속의 왕자와 비슷하다/ 야유 속에 지상에 유배당하니/ 거인의 날개가 걷기조차 힘겹게 하는구나.”(샤를 보들레르의 시 ‘앨버트로스’ 부분)

보들레르는 유복한 유년을 보냈지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어머니가 재혼하자 무절제한 생활의 늪에 빠져들게 되고 마침내는 거리의 여인 사라와의 성적 쾌락에 탐닉해 빚에 쪼들리게 된다. 이를 지켜보던 형 알퐁스가 그 사실을 의붓아버지에게 알리고, 이에 가족회의가 열려 보들레르는 1841년 1월 인도의 캘커타행 남해호에 실려 먼 항해를 떠나게 된다. 1859년 발표된 시 ‘앨버트로스’는 인도양 항해의 기억을 담고 있다. 배에 승선해 있던 한 군인에게 잡힌, 몸통 3m가 넘는 거구의 바닷새 ‘앨버트로스’가 수부들에 의해 질질 끌려다니는가 하면 온갖 방식으로 모진 박해에 시달리는 것을 본 보들레르는 충격을 받는다. 선원들에게 조롱당하는 새에게서 지상에 유배당한, 저주받은 자신(시인)을 보았던 것이다.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우리 시대 시인들의 왜소해진 초상을 떠올린다. 160년 전 유럽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위대한 시인의 결핍과 궁핍이 시대와 지역을 떠나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것, 아니 시간이 흐를수록 날개 다친 새처럼 더욱 추락해 자본 생태계의 가장 밑바닥에 처해져 있다는 사실이 서글프다.

또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필록테테스’와 같은 존재가 오늘날의 시인이 아닐까 하는 자괴, 자조감이 들기도 한다. 상속받은 치명적인 무기인 활과 화살을 가지고 트로이 전쟁에 참가하던 중 독사에 물려 상처를 입고 고약한 냄새를 피우며 고통으로 소리를 질러대는 바람에 그리스인들에 의해 섬에 팽개쳐진 신세가 돼버린 필록테테스처럼 세상의 이목으로부터 멀어진 처지가 돼버린 오늘의 시인들! 다음의 시는 어떤가?

“가젤영양 한 마리 물속의 악어에게 먹히고 있다. 순간이었다. (중략) 정확히 몸통을 물린 가젤영양은 물린 채 깊은 곳으로 끌려갔고, 먹이를 가로채려는 다른 악어 떼들의 싸움 속에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이건청의 시 ‘시인’ 부분)

생태보고서 형식을 띤 시의 화자(관찰자)는 악어에게 몸통을 물려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가젤영양이 다름 아닌, 오늘날 자본주의 생태계 먹이사슬에서 가장 낮은 단계와 위치에 놓인 시인임을 담담하게 전하고 있다. 빈곤과 차별의 실존적 위기에 처한 시인들은 ‘캘린더의 시간이 아니라 시계의 시간’(발터 벤야민)을 살고 있으며, 그런 이유로 사물과 세계 앞에서 계기판의 눈금 같은 영혼의 울림과 북극을 향해 바늘 끝이 흔들리는 지남철 같은 떨림을 경험하지 못한다.

대체로 텍스트 내에서는 시적 진실을 인정받지만 시 바깥의 현실에서는 조롱과 왜곡과 망각의 수모를 겪고 있는 시인들은 이제, 보다 체계화되고 세련된 방식으로 야만을 조장하는 시국에 대해 비분강개해 노여워하거나 울분을 토하지 않는다. 규율과 시간표에 익숙해진 시인들은 술을 줄이거나 끊고 밤이 오기 전 일찍 귀가를 서두른다. 모범 시민이 돼 물가를 걱정하고 부동산 경기와 주식 시세를 알아보고 월드 스포츠 경기 관람을 즐긴다. 목청껏 노래를 부르지 않고 선율이 흐르는 찻집에 앉아 낮은 목소리로 담소를 나누다 일어선다. 누구의 안부도 간절히 그립지 않은 시인들은 도시의 밀림 속을 저 혼자 길짐승이 돼 걸어간다. 시 쓰는 기술자가 돼버린 것이다.

이재무 시인·서울디지털대 교수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국민일보 신문구독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