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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의 문화스케치] 움직이는 사람


새해에 황현산 선생님이 쓴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난다, 2018)을 다시 읽었다. ‘예술가의 취업’이란 제목의 글을 읽고 상념에 잠겼다. “예술도 밥을 먹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니 밥벌이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직업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 논의를 좁혀 문학에 관해서만 말한다면, 문학 관련 학과를 졸업한 많은 작가가 출판계나 문화 관련 직종에서 직장인으로 생활하기도 하지만, 한 문인이 취직을 하지 않는다면 그가 작가로서 성공했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글쓰기에 방해가 된다고 해서 교수직을 그만둔 작가도 많다.” 사람은 밥만으로는 살 수 없지만, 밥이 없으면 삶의 조건이 마련되지 않는다.

이달에 나는 몸담았던 대학교에서의 근무를 마무리한다. 지난 2년간 문화 콘텐츠에 관한 다양한 강의를 했다. 문화 콘텐츠를 기획하고 개발하고 제작해 발표하는 것은 물론 기술의 발전이 문화 콘텐츠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학인들과 함께 공부했다. 대학에서 말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학생이라는 말보다 학인(學人)이라는 말과 가까워졌다. 은유 작가의 책에서 처음 접한 저 용어 덕분에 단상이라는 권위적인 장소에서 가뿐히 내려올 수 있었다. 학생이란 단어가 선생과 대비돼 가르침을 받는 느낌이 강한 반면, 학인은 말 그대로 ‘배우는 사람’을 뜻하기 때문이다. 배우는 도중에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 나는 스스로를 학인이라고 여긴다.

공모전을 준비하는 수업도 있었다. 공모전을 연습한다는 것은, 문제의 요지를 꿰뚫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몰두하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공모전 주체가 빼어난 아이디어와 대단한 창출 능력을 요구한다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다. 학인들과 함께 공모전을 준비하면서, 나는 공모전이야말로 문제를 잘 읽어내는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깨달았다. 근사한 답을 도출하는 것만큼이나 문제를 파악하는 데 노력을 들여야 했다. 대충 짐작해서 행동하거나 겉꾸미는 데만 열중하면 당락은 불 보듯 뻔했다. “문제 속에 답이 있다”라는 말은 진부하지만, 진부함을 장악해야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학인들은 무수한 공모전에서 고배를 마셨다. 어떤 이는 도전을 포기했고 어떤 이는 출발점에 서서 숨을 골랐다. 그때마다 나는 공모 요강을 꼼꼼하게 읽으라고 조언해줬다. 같은 학인의 입장이 돼 방향을 가리키기는 했을지언정 답을 제시하려 들지는 않았다. 공모전에서 수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은 제힘으로 문제를 직면하고 그것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것이었다. 스스로 부딪히지 않으면 문제 속의 답을 발견할 수 없었다.

다시 서두에 있는 황현산 선생님의 책 속으로 돌아간다. 이제 나는 직장인이 아닌 상태가 된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처럼 그것이 “작가로서 성공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나는 어떤 식으로든 계속해서 일할 것이다. 일하면서 틈틈이 글 쓰던 지난 시간은 밥벌이가 얼마나 숭고한지 깨닫는 과정이었다. 일하지 않을 때, 글 쓸 수 있는 절대적 시간은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글 쓰고 싶은 마음이 더없이 간절해지는 건 다름 아닌 일할 때다. 빽빽한 시간의 틈을 비집고 글을 쓸 때, 글 쓰는 일은 부단히 움직이는 일이 된다. 다른 사람을 향해, 나 자신을 향해, 세상을 향해 발걸음을 떼는 일이다. 계속 움직이기로 한다.

한곳에 머무르는 일에 소속감과 안정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내 직장, 우리 회사가 되면서 책임감도 강해진다. 머무르는 사람이 지닌 특유의 안정감은 주변에 좋은 기운으로 작용한다. 반면 여기서 저기로, 저기서 거기로 움직이면서 힘을 얻는 사람도 있다. 움직이는 사람은 자유롭다. 이 자유는 얽매이지 않는 상태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얽매이지 않고도 생활을 유지해야 할 책무를 포함하는 것이기도 하다. 움직이는 사람이 지닌 힘찬 에너지는 주변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공모전 연습을 하듯, 나는 다시 백지 위에 섰다. 백지 위에 수없이 많은 문제가 흩뿌려질 것이다. 신호총이 울리기 전, 목적지가 어딘지 응시하고 있을 것이다. 답을 찾아가는 일은 움직이면서 생생해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기획(企劃)의 의미를 되새긴다. 기획은 일을 꾀해 계획한다는 의미다. 움직이는 사람에게는 삶의 매 순간이 기획으로 가득 차 있다. 평생 배우고 싶은 것이다. 가만있을 때조차 그의 가슴속은 법석이고 있다.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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