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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당] 아웅산 장군

천지우 논설위원


미얀마 문민정부의 지도자 아웅산 수치는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으니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그는 미얀마의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아버지 아웅산(1915~1947) 장군의 후광으로 정치인이 돼 군사정권에 맞서 싸울 수 있었다. 오랫동안 수치를 탄압하던 미얀마 군부는 최근 5년간은 수치와 타협해 권력을 분점해왔으나, 지난 1일 쿠데타를 일으켜 다시 수치를 관저에 가뒀다. 그런데 이처럼 막강한 미얀마 군부의 기틀을 다진 이도 다름 아닌 아웅산 장군이다. 미얀마에서 아웅산이 갖는 위상이 워낙 커서 지금까지 군부가 수치를 탄압해도 직접적인 위해를 가할 수는 없었다.

아웅산은 불꽃 같은 삶을 살았다. 영국 식민지 시절 대학에서 독립운동을 모색하다 여의치 않자 1940년 중국으로 달아났고, 중국에선 일본군 정보장교 스즈키 게이지에게 포섭돼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시 일본은 미얀마에서 영국을 몰아낼 목적으로 반군을 키우려 했다. 아웅산과 뜻을 같이하는 ‘30인의 동지’가 규합됐고, 스즈키는 이들을 중국 하이난섬에서 훈련시켰다. 이들은 1942년 미얀마로 잠입했고 일본군과 함께 싸워 영국군을 몰아냈다.

그러나 나라의 주인이 영국에서 일본으로 바뀌었을 뿐 독립은 이뤄지지 않았다. 일본군의 도움을 받았던 아웅산은 이번엔 영국군의 도움을 받아 항일 투쟁을 벌였고, 결국 1945년 일본군이 철수했다. 하지만 미얀마를 다시 점령한 영국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아웅산은 1947년 1월 영국 정부와 협상을 벌여 독립 약속을 받아냈다. 그해 4월엔 총선에서 승리했다. 그리고 7월 예비 관료들과 회의를 하던 중 괴한의 총격으로 숨졌다. 다른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이 사주한 암살이었다. 겨우 서른두 살이었을 때, 조국의 독립을 코앞에 두고 암살로 스러진 것이다.

아웅산이 죽지 않고 미얀마의 지도자가 됐다면 어땠을까. 내전과 쿠데타 등 그의 사후 진행된 극심한 혼란은 덜하지 않았을까.

천지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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