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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 희망의 사람들] “펀치볼 칼바람이 내린 선물, 시래기가 생명줄이에요”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비닐하우스 덕장 안에서 무청 시래기가 국수 다발처럼 가지런히 널려 건조되고 있다. 지붕의 차양막으로 햇볕을 가려야 시래기의 초록색이 그대로 살아있게 된다. 이곳 시래기는 선명한 초록색과 구수한 향을 자랑한다. 지난해 3월 시래기 품목에서는 처음으로 ‘양구 시래기’(영문명: Yanggu Siraegi)라는 이름으로 지리적 표시 등록을 했다.

“‘양구 시래기’는 말라도 초록색이 고대로 살아있습니다. 맛은 또 얼마나 연하고 야들야들한데….”

강원도 양구군 ‘펀치볼 마을’에서 시래기 농사를 짓는 이석균(52)씨는 ‘초록색’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시래기 하면 처마 끝에 매달려 누렇게 시들어가는 무청 잎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 마을 비닐하우스 덕장에서 명태처럼 꾸덕꾸덕 말라가는 시래기의 초록색을 눈으로 확인하고 생각을 바꿨다. 시래기는 햇볕에 말리면 낙엽처럼 바스락거려 맛이 없다. 이렇게 그늘 속에서 말려야 빛깔도, 맛도 살아난다고 했다. 귀가 번쩍 뜨인 건 해안면시래기생산자협의회장을 맡고 있는 그가 “데친 뒤 껍질을 벗기지 않아도 된다”고 자랑했을 때였다. 요리 좀 해본 사람은 안다. 시래기 한번 삶으면 투명한 비닐처럼 일어나는 껍질을 일일이 까는 게 얼마나 번거로운지. 펀치볼 마을이 전국 최강 시래기 특산지로 뜨는 이유를 알 거 같았다.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의 이석균 시래기생산자협의회장이 지난 1월 중순 비닐하우스 덕장에서 ‘펀치볼의 보물’이 된 시래기를 소중히 감싸 쥐고 있다. 양구 시래기는 꾸덕꾸덕 말라 바스러지지 않고 잘 구부려진다.

펀치볼 마을은 이곳 해안면의 별칭이다. 11대째 300년간 이곳에서 산다는 그를 1월 중순 만났다. 해안면은 바다를 낀 마을이라고 오해받지만 해안면은 해발 400∼500m에 형성된 분지다. 한자로 ‘돼지 해(亥), 편안할 안(安)’을 쓴다. 뱀이 많았던 이 동네가 뱀을 이기는 돼지를 키워 편안하게 잘 살게 됐다는 설화에서 유래한다. 주변으로 가칠봉과 도솔산 등 1000m가 넘는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펀치볼이라는 별명도 분지 때문에 생겼다. 한국전쟁 때 외국의 종군기자들이 마을 풍경이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니 '화채(punch) 그릇(bowl)’ 같다며 그렇게 부른 데서 비롯됐다.

펀치볼은 분단의 생채기가 깊이 박힌 ‘접경지역’ 양구의 과거와 현재, 미래다. 양구의 첫인상을 결정짓는 건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리자 바로 눈에 들어오는 ‘군인용품 백화점’이다. ‘국민 화가’ 박수근의 고향 양구는 그렇게 군사 도시 이미지로 이방인을 맞았다. 비무장지대(DMZ)에 면한 접경지역 시·군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양구군 북동쪽 끝자락에 있는 ‘펀치볼 마을’은 북한과 아주 가깝다. 휴전선에서 면사무소까지의 거리는 불과 5.3㎞. 여의도공원 두 바퀴 거리다. 한국전쟁 중에는 가칠봉전투 등 고지전이 치열했다. 피비린내 진동한 전투의 파편은 아직도 남아 있다. 마을 안에는 지뢰밭이 두 군데나 있어 번번이 지뢰 사고가 난다. 북한의 김일성고지에서 빤히 내려다보이는 해안면 만대리에는 1979년 대(對)북한 선전용으로 지은 주택 79채가 남아 있다.

해안면 분지 북단 ‘양구통일관’에 전시된 미사일. 양구에서는 한국전쟁 중 가칠봉 전투 등 고지전이 치열했다.

전쟁 직후 해안면 분지는 탄피와 지뢰가 널려 있는 허허벌판 황무지였다. 전쟁 전에는 북한 땅이었던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1956년 4월부터다. 6사단 군용 트럭에서 내린 160세대의 주민들은 ‘사상검증’까지 받았다. 유사시 농기구 대신 총을 들어야 한다는 민북마을 설립 조건에 따라 중장년층으로만 구성됐다. 이씨의 할아버지도 그렇게 가족과 이곳에 돌아와 터전을 잡았다. 농사지을 땅이 없어 탄피를 줍고 군부대 밭을 갈아주고 얻은 곡식으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다.

황무지를 개간해 밭을 일궜다. 1990년대까지는 강원도에서 흔했던 고랭지채소를 주로 했다. 고랭지 농사는 수급 요인에 따라 대박이 나거나 아니면 쪽박을 차야 했다. 집집마다 빚이 넘쳤다. 오죽하면 양구군 농협이 파산했을까. 그런 불안정성을 없애기 위해 이윤은 적지만 상대적으로 안정된 작목인 감자, 옥수수 농사를 지었다. 여기에 시래기 농사가 추가되며 효자 작목으로 떠오른 것이다. 껍질을 벗기지 않는 시래기 전국 공급량의 90%를 차지한다.

이곳이 전국 최고 시래기 주산지가 된 것은 우연이다. 아니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친 끝에 찾아낸 출구였다. 해안면 사람들도 전국 농가가 그렇듯이 가을 김장용 무를 수확한 뒤 그 무청으로 시래기를 했다.

때는 2005년. 당시 30대이던 동네 후배 라명석씨가 어느 날 이런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형, 김장 무는 값이 너무 널뛰듯 하잖아. 우리 대신에 시래기 전용 무를 해보면 어떨까.”

무청을 수확하고 남은 무밭. 양구 시래기는 무청만 쓰고 상대적으로 크기가 작은 무는 이렇게 버린다.

사람들이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즈음이었다. 무를 버리고 시래기용 무청만 취하자는 것이었다. 시장 조사를 해보니 승산이 있을 거 같았다. 생각이 비슷한 30, 40대 마을 청장년 7, 8명이 의기투합했다. 작목반을 구성해 시래기 농사를 지었다. 내친김에 시래기 축제까지 기획해 열었다. 그때부터 지난해 코로나19로 취소한 걸 빼면 매년 10월 마지막 주 토, 일 이틀간 ‘DMZ 펀치볼 시래기 축제’를 연다. 지금은 해안면에서 시래기 작목반 참여 농가는 230가구로 늘었다. 전체 40만평에서 생산하는 시래기 물량이 400t이나 된다. 1㎏에 1만원 치면 총 40억원의 수입을 거둔다. 농가당 평균 1700만원의 수입을 올린다. 겨울철에 쉬던 농가들이 시래기 덕분에 추가로 수입이 생긴 것이다.

“시래기 덕분에 해안면 사람들도 드디어 저축을 하기 시작했어요. 저축을.”

농사를 짓기 위해 대출을 하고, 그 빚을 갚기 위해 다시 농사를 지어야 하는 빚의 악순환이 끊긴 것이다.

양구 시래기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잎이 무성하고 연해 맛있기 때문이다. 펀치볼 분지가 없었다면 이렇게 야들야들한 시래기는 나오기 힘들다. 시래기는 건조 과정에서 계속 시원한 바람이 불어야 한다. 가칠봉의 눈은 봄까지도 녹지 않는다. 그 천혜의 바람이 분지 안에서 맴맴 머물러 무청을 말리는 데 최적의 조건을 만들어낸다. 펀치볼의 선물, 시래기 덕장에서 이 회장이 ‘엄지척’ 하는 이유를 알 거 같았다.

후원: 문화체육관광부·한국관광공사

사진=변순철 사진작가, 글=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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