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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섬情談] “책을 왜 읽어야 하나요?”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청중이 손을 번쩍 들고 묻는다. 책을 왜 읽어야 하는지. 이런 질문을 처음 받았을 적에는 아주 무서웠다. 답이 어렵지는 않다. 지식과 정보를 얻으려고, 위로와 평화가 필요해서, 남는 시간을 즐겁게 보내려고 등 몇 가지 답이 있다. 무서운 것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또는 한밤중에 문득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순간이다. 반백 년 책을 읽어 왔는데, 아직도 답을 모르는 게 참담하다.

학창 시절 비슷한 종류의 질문에 선생님이 빤한 대답을 늘어놓으면 답답하다고 생각했다. 더 참신한 답이 있을 듯했다. 미래가 시시한 답만 가득하다면 열심히 살아 뭣하나 싶었다. 치기였고 오만이었다. 이제야 이해가 간다. 가장 궁금한 질문을 던질 때마다 선생님들 얼굴에 씁쓸한 표정이 떠오른 이유를. 역정을 부리거나 지나치지 않고 식상한 답이라도 해준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는지, 점수를 잘 따려면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출세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등에는 경험으로 답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이 어디에서 오는지, 어떻게 살아야 의미 있는지, 인간이 왜 사는지 등은 아무리 경험이 쌓여도 도무지 알 수 없다. 인생은 시간의 갈피 속에 모든 것을 감추어 둔 채 열심히 애쓰는 이들이 찾을 수 있도록 했으나, 단 하나 ‘의미’만은 마련해 두지 않은 듯했다. 인생에는 애초에 답할 수 없는 질문이 있는 셈이다.

책을 읽는 이유에 대한 비교적 참신한 답도 있다. 과학은 ‘독서의 목적’에 대한 질문을 ‘독서 과정과 효능’에 대한 질문으로 바꾼다. 뇌를 들여다보는 도구를 이용하면 읽기가 인간을 어떻게 바꾸는지 확인할 수 있다. 여러 연구 결과를 종합할 때 독서는 역동적 활동이다. 영상과 비교해서 언어는 정보 전달에 불리하다. 그러나 덕분에 읽기 과정은 인간과 정보의 자발적·능동적 대화를 생성한다. 정보의 수동적인 수용에 가까운 시청과 달리 독서는 읽어 들인 정보에 체험과 상상을 섞어야 작동한다. 정보의 힘겨운 간접 체험이기에, 인간은 읽기를 통해 정보를 더욱더 많이 자기화할 수 있다. 특히 풍부한 맥락을 긴밀히 조직해 제공하는 소설 같은 ‘긴 글 읽기’의 경우 무척 효과적이다.

읽기는 후각·미각·촉각 등 인간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고 운동 능력을 끌어올리며 타자에 대한 공감력을 길러주고 낯선 것에 대한 적응력을 높인다. 읽기는 인간을 주체적·비판적·창조적으로 만든다. 읽을 때마다 뇌의 여러 신경 중추는 활발히 움직이면서 서로를 연결하는 깊고 넓은 연결망을 형성한다. 직접 경험을 능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읽기는 덜 위험하고 더 쉽게 뇌의 정보 전달 회로를 탁월하게 바꾼다.

독서의 과학이 내놓은 답들은 구체적이어서 청중을 만족시킨다. 그러나 독서가 인간의 자기 계발에 도움되고, 우리의 뇌를 좋은 쪽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을 알더라도, 마음 한쪽에는 여전히 흡족하지 않은 기분이 남아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 “모든 가능한 과학적 물음이 답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삶의 문제들이 여전히 조금도 건드려지지 않은 채 있다고 느낀다.” 어쩌면 읽기의 의미는 뇌를 스캔하는 방법으로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효능은 의미가 아니다. 기계 장치가 우리 뇌의 동작과 변화를 남김없이 파악한 후에도, 실제로 답해진 것은 ‘어떻게’일 뿐 ‘왜’는 남아 있다.

답은 아직 또는 영원히 알 수 없으나 질문은 분명히 있다는 것, 이것이 우리 고뇌의 근원을 이룬다. 그러나 이런 질문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인간은 답할 수 없는 질문을 품음으로써 더 크게 노력해 경험을 축적하고, 더 넓게 시도해 자유를 확장하며, 더 깊게 탐구해 의미를 구축하려고 애쓴다. 이러한 분투가 없을 때 삶은 아무것도 아니다. “책을 왜 읽어야 하나요?” 과학의 대답을 꾸준히 살피되 그 너머를 들여다보는 일을 멈추고 싶지 않다. 끝내 답을 몰라도 괜찮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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