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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사니] 종이책의 미래

조성은 국제부 기자


오래전부터 여러 외국어에 관심을 두고 공부를 해서 집에 사전류가 꽤 많다. 두께가 손바닥만 한 커다란 사전은 네댓 권 되고 휴대성을 고려해 작게 나온 사전도 두어 권 있다. 전자사전이 없던 시절은 아니었지만, 학습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영어와 중국어, 일본어 위주여서 독일어나 프랑스어 같은 ‘소수어’를 공부하려면 여전히 종이 사전이 필수였다.

하지만 포털 사이트가 공짜로 다국어 사전을 제공한 뒤부터 종이 사전은 죄다 애물단지가 됐다. 지금은 실내로 들어온 강풍이 방문을 세게 닫지 않도록 괴는 받침돌로나 쓰인다. 이런 쓸모라도 찾지 못했다면 무더기로 폐지 수거함으로 내버려지는 신세를 피할 수 없었을 테다.

포털 사전이 등장하면서 외신을 참조해 기사를 작성하는 국제부 기자들의 책상도 완전히 바뀌었다. 과거 국제부에서는 복잡하게 꼬인 문장을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해 두꺼운 사전을 넘기며 고심하는 기자를 쉽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 국제부 책상에는 노트북 거치대와 멀티탭만 놓여 있을 뿐이다. 인공지능(AI) 번역기가 빛의 속도로 문장을 풀어주는 세상에서 괴짜가 아니고서야 종이 사전으로 단어를 찾는 사람은 이젠 없을 것이다.

다만 사전을 제외하면 종이책을 소비하는 내 습관은 정보통신(IT) 기술의 발전과 무관하게 예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소설이든, 학술서든 간에 종잇장을 한 장씩 넘기며 읽지 않으면 머릿속에 입력이 잘 되지 않는 느낌이다. 넘긴 책장과 남은 책장을 비교하며 얼마나 읽었는지 눈대중을 하는 맛도 전자책으로는 전혀 느낄 수가 없다. 인터넷 서점에서 전자책 버전을 구매하는 게 훨씬 저렴하지만 끝내는 종이책을 구입하고 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IT 환경에 최적화된 콘텐츠가 없는 것은 아니다. 웹툰과 웹소설이 대표적이다. 특히 짧은 문장과 구어적 문체, 공상적 소재, 그리고 이른바 ‘사이다’ 전개를 특징으로 하는 웹소설은 손바닥만 한 스마트폰 화면으로 즐겨도 전혀 불편하지 않다. 문고판 책 한 권 읽을 틈조차 나지 않는 만원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웹소설을 읽는 사람을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도리어 웹소설을 종이책으로 출간하는 게 더 어색한 일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하지만 웹소설 같은 일부 특별한 사례를 제외하면 종이의 대안은 웬만해서는 나오지 않을 것 같다. 고전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어 한두 권씩 사들이다 공간을 너무 많이 차지할 것 같아 모두 처분하고 전자책으로 대체해볼까 생각해 봤지만 금세 단념했다. 한 문장을 오랫동안 곱씹고, 필요하다면 이미 읽었던 부분도 다시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한 고전을 전자책으로 읽는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어서다. 정부 기관에서 파일 형태로 배포한 보도자료조차 내용이 길고 복잡하면 종이로 출력해서 봐야 한다. 하물며 보도자료보다 훨씬 집중해서 봐야 하는 고전을 화면으로 본다는 건, 적어도 내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종이책의 생명력을 엿볼 수 있는 다른 분야는 바로 영유아용 도서다. 커다란 그림과 글씨로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우는 형태여서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 같은 IT 기기로 쉽게 대체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사정은 그렇게 간단치 않은 모양이다. 자칫 스마트폰 중독으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우려가 적지 않아서다. 전문가들은 너무 이른 나이에 IT 기기를 접하면 두뇌 발달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있다며 책을 통한 ‘아날로그식 학습’을 한목소리로 권장하고 있다.

이 조언을 받아들인 부모들은 자녀가 일찌감치 책 읽는 습관을 들이도록 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아기의 인지·정서 발달에 좋다는 해외 유명 브랜드의 전집류는 세트당 수백만원을 호가한다. 이런 세태를 보면 앞으로 수십년 동안은 종이책이 사라질 일은 없을 모양이다. 덕분에, 이제 13개월인 아들의 장서가 급격히 늘어 집에 발 디딜 틈이 없을 지경이 됐다.

조성은 국제부 기자 jse13080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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