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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포럼] 과거의 구속, 과거로부터의 자유

한준 (연세대 교수·사회학과)


3년 전 빙상계는 코치 폭행과 성폭력 사건으로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다. 이후 가해자는 재판으로 엄한 처벌을 받고, 스포츠계 전반에 걸쳐 인권 유린 조사가 실시되는 등 강력한 대응이 이어졌다. 그런데 지난해 6월 감독과 동료, 팀닥터의 가혹 행위로 최숙현 선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스포츠계에 폭풍우가 또다시 몰아쳤고, 국회는 가혹 행위와 인권 유린에 대한 강력한 처벌과 스포츠 윤리 강화를 골자로 한 최숙현법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1년이 채 못돼 이번에는 배구계가 폭력 때문에 들끓고 있다. 이번에는 현재의 폭력이 아닌 과거의 폭력 즉 학교폭력(학폭)이 문제가 됐다. 남자와 여자 배구의 간판 스타들로부터 폭력을 당했던 피해자들의 고발이 SNS에 연이어 올라오면서 엄청난 비난 여론과 구단, 연맹, 협회의 징계가 이어지고 있다.

현재가 아닌 과거의 잘못 때문에 우수 선수의 경력에 오점을 만들어야 하는가 라는 반론은 소수 의견에 불과하다. 국민 대부분은 과거 폭력을 당해 힘들었고 지금도 힘들어하는 피해자들의 고통에 공감하며 가해자들을 강력히 제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스포츠 스타에 국한되지 않는다. 표절 논문으로 학위를 받은 것이 드러나 방송 활동을 중단한 유명 가수, 학폭 가해자였던 과거가 들통나 경연프로그램에서 스스로 하차한 가수 등 대중문화계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많이 있다.

과거의 잘못된 선택이나 행동이 현재 승승장구하는 경력의 발목을 잡는 경우를 보면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의 ‘도덕적 경력’이란 말이 떠오른다. 고프먼은 이 말을 통해 개인의 정체성과 도덕적 지위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삶의 궤적 속에서 만들어진다고 주장했다. 직업에서의 경력과 도덕적 경력은 비슷한 점이 많다. 이전 직장에서 우수한 성과를 거두며 주변 사람들의 칭찬과 부러움을 받던 사람이 새 직장에서도 좋은 조건과 많은 권한을 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대로 별다른 성취를 이루지 못한 사람이 갑자기 좋은 직장에서 선망하는 자리를 얻기는 매우 어렵다. 직업 경력이 이렇게 연속성을 가지듯 도덕적 경력도 일관성을 지닌다.

사람들은 살면서 자신이 가진 악한 성품 혹은 선한 성품을 계속 강화해 가는 경우가 많다. 게임을 리셋하듯 철없던 지난 시절의 잘못을 없애버리고 전혀 새로운 나를 만들기는 어렵다. 주목할 점은 도덕적 경력이 직업 경력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중적 인기를 누리는 스타나 사회적 지위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도덕적 기대 수준 때문이다. 과거의 잘못에 발목 잡힌 스포츠 혹은 대중문화 스타 외에도 과거 인터넷이나 SNS에서 행한 혐오 표현이나 언어 폭력이 밝혀져 공무원 임용이 취소되고 대기업 취직이 무산되는 경우가 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부끄러운 과거, 잊고 싶은 과거로부터 절대 벗어날 수 없는가. 잠시 잘못된 판단으로 발을 들인 악의 경력에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는가. 전과자에 대한 차별 반대와 인권 존중을 강조하는 현대 사회에서 과거 낙인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면 그것은 지나치게 가혹할 뿐 아니라 옳지 않다. 피해자를 고통의 멍에로부터, 가해자를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려면, 무엇보다 가해자의 철저한 반성과 진심어린 사죄, 그리고 피해자의 용서가 필요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현실에서 우리가 더 많이 접하는 것은 가해자의 사죄와 피해자의 용서라는 선순환보다는 피해자의 공격과 가해자의 발뺌 혹은 악어의 눈물이라는 악순환이다. 끊임없는 비교와 경쟁이 일상화된 세상에 살며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상처와 아픔을 겪고 불행을 키워 간다. 과거 잘못에 대한 사죄와 용서를 통한 화해라는 성숙의 과정이 우리를 상처와 아픔, 불행으로부터 구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사죄나 용서 어느 것도 필요 없이 과거 악행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최후 성역이 아직 남아 있다. 바로 정치와 권력의 영역이다. 선출된 권력의 면책특권이 그 자리에 있는 이들을 현재 악행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면, 청문회에서 어떤 과거 의혹이 드러나도 강행되는 장관 임명은 이들을 과거 악행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준다. 우리 사회에서 정치권에 대한 신뢰가 모든 분야 중 가장 낮은 수준이고, 다수 국민이 불행의 원인으로 정치를 꼽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한준 (연세대 교수·사회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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