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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주의 알뜻 말뜻] 요즘은 무슨 낙으로 살고 있나요?


영어공부를 한다고 열심히 학원에 다닌 적이 있었다. 삼십대 무렵의 일이다. 외국인 강사를 앞에 두고 열댓 명이 둘러앉아 서툰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 재미있었다. 하루 일과 중 제일 즐거운 시간이어서 빼먹지 않고 다녔다. 같은 반 수강생들과 친해져 강의 후 카페에 앉아 서로의 연애담으로 영어 대화를 이어가기도 했다. 7~8개월이 지나면서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학원 강의실에 앉아 비슷한 수준의 말을 주고받는 일이 지루해지기 시작하고, 재미는 점점 희석돼 갔다. 그와 동시에 영어 실력도 더 이상 늘지 않았다.

한때는 도서관에 열심히 다닌 적도 있었다. 수많은 책 중 내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보는 것이 즐거워 날마다 출근을 하다시피 했다. 오늘은 또 어떤 문장과 단어를 발견하게 될까 설렐 정도였다. 도서관 열람실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종일 책을 읽으며 혼자 보내는 시간이 한없이 평화로웠다. 그 즐거움 하나로 한 시절을 보냈다.

운동이나 스포츠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국선도나 요가를 배울 때는 아침저녁으로 갈 만큼 재미있었다. 굳은 몸이 조금씩 풀리고 처음에는 불가능했던 동작이 어느새 가능해지면서 재미는 배가돼 이 일은 수년 동안 지속됐다. 바빠진 업무를 핑계로 결국은 둘 다 멈춰버렸지만, 당시 그것은 내 생활의 가장 큰 낙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서둘러 이부자리 속을 빠져나오고 싶게 만드는 그 무엇. 잠자리에 드는 시간보다 잠에서 깨는 시간을 더 기다리게 만드는 것. 때로는 그것이 연애이기도 하고 여행이기도 했으며 새로운 공부이기도 했고 내게 주어진 새로운 업무이기도 했다. 생활의 원동력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삶의 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소확행이 되고, 어떤 이에게는 더 지속되고 깊어져 삶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중년의 나이가 되면서 친구들끼리 모이면 자주 약 이야기를 하게 된다. 누군가는 혈압약을 먹고 누군가는 영양제를 빼놓지 않는다. 챙겨먹어야 할 약 정보가 넘친다. 중년을 지나 노년이 되면 우리도 ‘약 기운으로 살아야 한다’며 웃기도 한다. 하지만 병을 다스리는 약은 있을지언정 삶을 다스릴 수 있는 약을 그 어디서 처방받을 수 있겠는가. 중학교에서 처음 한자를 배울 때는 쓰디쓴 약을 뜻하는 한자어 ‘藥(약)’이 다디단 즐거움을 뜻하는 ‘樂(낙)’과 닮은 것이 의아했는데, 이제는 그 이유를 아는 나이가 됐다. 그것이 무엇이든 낙이 없으면 시간을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침에 눈을 뜨고 나서도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나고 싶지 않다면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해야 할 때가 됐다는 뜻이다. 새로 맞는 하루하루의 시간들을 기뻐하며 나를 그 시간 속에 기분 좋게 밀어 넣는 그 무엇을 찾아내는 일, 혹은 내가 가지고 있는 무언가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일. 그것이 우리가 그토록 열심히 주고받은 새해 인사의 ‘복’을 찾는 일일 것이다. 당신의 약이 되고 즐거움이 되고 음악이 되는 그 일과 함께 곧 다가올 봄을 맞이하기를.

카피라이터·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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