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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에서] 불신사회

지호일 경제부 차장


지금 창밖을 한번 내다보시라. 세상이 온통 누리끼리하다. 미세먼지가 자욱한 탓만은 아닌 것 같다. 사회 상층의 굴뚝에서 내뿜어진 불신 덩어리가 둥둥 떠다니며 세상을 기분 나쁜 색조로 물들이고 있다. 숨 막히게 한다. 정치인과 고위 공직자들이 뱉어내는 거짓말, 반복되는 억지와 궤변, 그리고 영혼 없는 사과 따위가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넘쳐흘러 시중에 불신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것이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톡 까놓고” 했던 탄핵 발언을 부인했다가 ‘거짓말 명수’라는 조롱의 대상이 됐다. 설마 후배 법관이 내밀한 대화를 녹음하고 그걸 공개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겠지만 대법원장의 천연덕스러운 거짓말은 법원 전체의 신뢰를 껴안고 추락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신뢰를 잃는 것이 가장 치명적인 사법부에서 그 수장이 민낯을 가리고 있던 가면을 제 손으로 반쯤 벗어버렸으니. 그는 “부주의한 답변이 큰 실망과 걱정을 끼쳐드렸다”고 사과했지만 이미 그가 던진 불신의 씨앗은 재크의 콩나무처럼 커져버렸다. 사퇴를 거부하며 언급한 “사법 개혁 완성”의 다짐은 그래서 허무하고, 불편하다. 이제 남은 임기는 후유증을 앓는 시간이 될 터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도 과거 자신이 꺼냈던 ‘검찰의 재단 계좌 사찰 의혹’에 대해 최근 “사실이 아니었다”며 고개를 숙였다. 검찰 측 부인에도 1년 넘게 의혹 제기를 멈추지 않던 그가 ‘조국 흑서’ 저자들의 추궁에 못 이겨 실토한 것이다. ‘검찰 쿠데타’ 음모론의 효용성이 이제 다 됐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정의부(Ministry of Justice)’ 장관들은 어떠한가. 조국·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은 자녀 관련 각종 특혜 의혹에 “관여한 바 없다” “소설 쓴다” 등으로 철판을 둘렀다가 거짓말이 드러났다.

위의 일들은 맥락 없는 사안이지만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개혁을 내세운다. 마치 큰 정의 달성을 위해 가는 길 주변에 싹트는 불신 정도는 무시해도 되는 것 아니냐고 강변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회 리더격 인사들이 불신 공급자 노릇을 하는 상황은 국가기관과 제도, 정책 전반에 대한 불신 풍조와 겹쳐진다. 원칙 있는 정책, 실효적 정책이 아닌 권력과 여론의 기분을 맞추는 정책은 이를 더욱 부채질한다.

공매도 금지 문제만 해도 그렇다. 최근 벌어진 공매도 논란의 핵심은 주가 하락 우려가 아니라 줏대 없는 정책이 초래한 불신이다. “공매도 금지 조치는 3월 15일 종료될 예정”이라고 단언하던 금융위원회는 정치권 압박에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더니 결국 5월 2일까지 금지 기간을 재연장했다. 4월에 보궐선거가 없었다면 이런 결정을 했을까. 제도 개선을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게 당국 설명이지만 진짜 제도 개선이 필요했다면 지난 1년 금지 기간 동안은 뭐하다 이제 와서 허둥지둥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부동산 정책에 대한 불신은 조건반사적이라 할 정도다. 정부는 집권 후 두 달에 한 번꼴로 대책을 내놓으며 매번 “이번에는 다르다”고 장담했지만 결과는 집값, 전셋값의 기록적 상승이었다. ‘특단’ ‘공급 쇼크’ 등의 표현까지 동원된 ‘2·4 대책’도 하루 뒤 여론조사에서 ‘가격 안정화에 도움되지 않을 것’이란 응답이 53.1%에 달했다. 신뢰 상실 지경이라 할 수 있다.

불신은 개인의 마음 속 문제로만 머무르는 게 아니라 사회를 향한 불만과 분노, 분열로 확대 재생산된다. 백신도 없고, 치료법도 없다. 지금도 우리 청년들은 창밖 세상에 대한 믿음을 버려가고 있는 중인지 모른다. 그게 두렵다.

지호일 경제부 차장 blue5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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