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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서겠네” 젊은층 매료됐다…윤여정 유머의 매력 [돋을새김]

이영미 온라인뉴스부장


최근 공개된 보그코리아 화보의 주인공은 배우 윤여정이다. 영화 ‘미나리’로 미국에서 여우조연상을 싹쓸이하고 오스카상까지 노리는 최고령 한류 스타. 예능프로 ‘윤스테이’에서 고택을 누비며 “어우, 내 정신 좀 봐, 나 증말” 같은 속사포 말투로 ‘휴먼여정체’를 유행시킨 힙한 그녀다. 올해 연예계 최고 블루칩 윤여정은 검은 롱드레스에 풀메이크업을 한 고혹적 자태로 말했다. “독자 여러분 정말 죄송해요. 제가 (이 나이에) 화보를 찍었어요. 꼴보기 싫더라도 (참고) 얼른얼른 넘기세요.”

윤여정은 여느 여배우처럼 말하지 않는다. 74세 할머니처럼은 더욱 아니다. 윤여정은 윤여정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윤여정다움을 완성하는 건 유머감각이다. 한때 천재감독 김기영의 페르소나로 불렸던 20대 스타는 10여년 만에 미국에서 돌아와 TV드라마의 단역을 전전하는 서러운 세월을 보냈다. 그녀는 종종 그 시절을 언급한다. “돈이 없으니까 드러워도 난 해야 하잖아. 내 새끼 둘 먹여살리려면.” 눈물 토크가 이어지려나 하면 반전이 튀어나온다. “나를 평창동 비구니로 지켜준 두 아들이 보배야. 호호호.” 윤여정의 고백은 비장하지 않다. 대신 시크하다. “내 새끼 둘 엄마 역할을 너무 끔찍하게(열심히) 했기 때문에 국민 어머니는 됐어, 관심 없어.” 싱글맘 윤여정의 자기연민은 딱 여기까지다.

영화 '미나리' 속 윤여정 배우. 영화사 제공
윤여정식 농담의 핵심에는 은근한 자기비하가 있다. 어느 인터뷰에선가 그녀는 ‘미나리’의 제작사가 브래드 피트의 플랜B라는 걸 듣고 혹했던 얘기를 전하며 “우리 유명한 사람 좋아하잖아. 돈은 좀 주겠구나 그랬는데 0을 하나 잘못 알아들었어”라고 웃었다. 중년 취향을 저격하는 생활밀착형 농담이다. 윤여정이 “내가 늙은 여우인데 (영화 촬영) 첫날 손발 안 맞는 세트장에는 안 가려고 해”라고 말하거나, “나는 인품이 별로 없잖아요. 소문 들어 알겠지만”이라며 까르르 웃을 때면 그녀를 따라 웃지 않을 도리가 없다. 칭찬은 그녀만의 방식으로 소화한다. 일부러 NG를 내 후배 실수를 커버해줬다는 미담이 소개되자 “나 동상 서겠네”라는 말로 좌중을 웃겼고, 시사회에서 감독이 자신을 레전드라고 소개했을 때는 “그거 내가 늙었다는 뜻이잖아요”라고 받아쳤다.

유튜브에서는 그녀의 영어 인터뷰가 화제다. 미국에서 10년 넘게 거주한 윤여정을 보며 “70대가 영어를 하네” 놀라는 건 한심한 편견이다. 하지만 어쩌랴. 그녀의 영어가 감탄을 부르는 건 사실이다. 개인의 매력이 빛날 때 영어는 거들 뿐이라는 자명한 진리를 확인시켜주기 때문이다. ‘윤스테이’에서 한 외국인이 오징어먹물이 들어간 음식을 보며 “우리 독살하려는 건 아니죠?”라고 농담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받았다. “낫 투나잇, 메이비 투모로(오늘밤은 아니에요, 내일은 모르죠).” 노배우가 입가에 슬쩍 스릴러의 미소를 올리는 순간 네 단어짜리 막간 희극이 얼마나 훌륭한지 박수가 나올 뻔했다.

예능에서 후배들과 일하는 윤여정을 보면 그가 젊은 세대에게 사랑받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녀는 베테랑이지만 새로운 일을 할 때는 매번 당황하고, 미친 듯이 조바심치고, 진이 빠지게 노력한다. 내가 어떤 성취를 해왔든 지금 이 일 앞에서 나는 젊은 당신과 평등하게 부족하다는 태도에는 감동적인 구석이 있다. 봉준호 감독은 그런 윤여정을 멋지게 표현했다. “반세기가 지났는데 선생님은 진취적이세요. 깃발 들고 막 그런 게 아니고 자연스럽게 진취적이세요.” 그의 평가에 한 줄 보태자면, 윤여정에게서 우리 사회가 투명인간 취급해 왔던 ‘늙은 여자’의 진짜 모습을 봤다. 할머니라는 이름에 가려 잊혀진 존재. 가족 관계의 바깥에서, 직업인으로 내내 빛나고 있었던 프로의 얼굴 말이다.

이영미 온라인뉴스부장 ym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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