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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은 패션이다] ‘3국지’서 케이블·종편까지… 현장서 겪은 예능의 역사

<1> 프롤로그


예능 제목을 보면 시대의 고민과 욕구가 동시에 보인다. 1인 가족이 늘어나니 ‘나 혼자 산다’가 주목받고 무명 가수가 쌓이니 ‘싱어게인’이 편성되는 식이다. 편 가르는 사람들이 많으니 ‘안 싸우면 다행이야’가 나오고 일탈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니 ‘선을 넘는 녀석들’도 등장한다.

외국인이 몰려오니 ‘이웃집 찰스’도 마주치고 ‘어서 와 한국은 처음이지’ 같은 인사도 당연해 보인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인구가 증가하니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에 이어 ‘개는 훌륭하다’까지 나오는 현실과 마찬가지다.

이름이나 제목을 알맞게 붙인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무한도전’은 원래 ‘무모한 도전’이었다. 무(無)자가 붙었으니 뭔가 없다는 건데 어감이 사뭇 다르다. 무모한 건 ‘꾀가 없다’(혹은 ‘계획이 없다’), 무한한 건 ‘끝이 없다’는 뜻이니 제목이 바뀌면서 소재의 확장성을 얻은 셈이다. 같은 팀이 만드는 ‘놀면 뭐하니’ 제목이 만약 ‘노는 물이 다르네’였다면 어땠을까. 호감보다 반감이 생기진 않았을까.

이번 시리즈의 제목도 처음에 ‘예능은 시대다’가 후보였다. 직전 ‘드라마는 시대다’의 연장선에 있어서다. 예능엔들 시대정신이 없으랴. 그런데 TV나 라디오에서 ‘시대’하면 뭐가 연상되는가. 야인시대, 소녀시대, 여성시대, 라디오시대. 개인적으로 ‘시대’라는 단어가 예능에 붙으면 먼저 떠오르는 말이 시대유감, 시대착오다. 시행착오는 줄이면 되지만 시대착오는 지면 낭비, 시간 낭비다. 결국 고심 끝에 탄생한 제목이 이것이다. ‘예능은 패션이다’.

패션은 두 개의 영어단어에서 빌려온 것이다. 하나는 Fashion, 다른 하나는 Passion이다. 앞의 것은 양식과 유행, 뒤의 것은 열정과 수난이다. 억지로 네 단어를 연결하자면 이렇다. ‘새로운 양식으로 유행을 선도하는 자에겐 열정이 필요한데 거기엔 적잖은 수난이 따른다.’

이제부터 무엇을 쓸 것인가 설계해야 한다. 실은 그에 못지않게 누가 쓰는지도 중요하다. 앞의 연작물은 평론가 두 분(공희정·황진미)이 집필했다. 그 분들의 글에는 ‘나’라는 말 대신 ‘필자’가 등장한다. 3인칭 관찰자 시점이다. 객관성을 유지하려 고증한 흔적이 역력하다.

이 글을 쓰는 ‘나’는 평론가가 아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말이 시작부터 나를 짓누른다. 그러나 나는 평론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므로 유유히 글 속을 활보할 생각이다. 그냥 나의 경험담을 1인칭 관찰자 시점, 가끔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솔직하게 남기고 싶다.

나는 분석하지 않고 주로 해석한다. 그것도 좋게 해석하려 애쓴다. 나는 ‘예능 문제아들’에게서 장점을 찾아보려 한다. ‘아는 형님’을 보면 옛날 교실에서 선생님이 하지 말라 하셨던 것들이 다 보인다. ‘까불지 마’ ‘떠들지 마’ ‘웃기지 마’ ‘딴생각하지 마’ 그러나 보라. 까불대고 떠들고 웃기고 딴생각했던 아이들이 가져온 즐거운 예능의 세계를. 다른 시각으로 보면 봉숭아학당은 가장 민주적이고 창의적인 교실이었다.

문제가 남느냐, 내가 남느냐.(도전 골든벨!) 내 계획은 이렇다. 무릇 경험에는 직접경험과 간접경험이 있다. 내가 직접 기획하고 연출한 예능뿐 아니라 선배, 동료, 후배들의 작품을 보며 느낀 것들을 약간은 주관적으로 기록해두고 싶다. 시청자로서 가졌던 호기심이나 의문도 깔끔하게 해소하고 싶다. 그 방법을 찾는 데 나의 이력을 최대한 활용할 참이다.


나는 ‘쇼쇼쇼’(TBC)가 방송되던 흑백 TV 시절부터 부지런한 예능 시청자였고 설운도가 ‘잃어버린 30년’을 부른 특별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KBS)가 방송되던 1983년 이후부터는 직접 방송사에 들어가서 PD로 일했다. 전국방송(MBC), 지역방송(OBS), 종합편성채널(JTBC) 등 다닌 곳도 나름 다채롭다. 일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고 지금도 즐겁게 만나고 있다. 기본적인 친화력과 네트워크의 접점을 최대한 살릴 것이다. 객관성은 살짝 모자라도 현장성은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한다. 다만 변명 삼아 미리 밝혀두자면 예외 없는 규칙이란 없다는 점이다. 여러 편을 쓰다 보면 처음 다짐했던 것과 다소 다른 점도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예외가 많으면 신뢰가 사라진다는 점도 명심할 것이다. 마지노선은 끝까지 지킬 참이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하나 나왔다. 마지노선이다. 나는 이 말을 ‘마지막까지 노(NO)라고 말해야 할 선(line)’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오죽하면’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게 예능의 숙명이다. 선을 넘으면 TV에선 살아남기 힘들다. 예능에서의 선은 선(線)보다는 선(善)에 가까운 개념이다. 재미에도 마지노선이 있다. 이 선은 경도와 위도가 정해져 있는 게 아니다. 시대에 따라 좁혀지기도 하고 넓혀지기도 한다.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한다. 어떤 때에는 통용, 허용되다가 어떤 때에는 제한, 금지되기도 한다.

‘하지 말라는 것은 다 재미있다’라는 책이 있다. 개그맨 전유성이 썼다. 반대로 ‘재미있는 것은 다 하지 마라’고 느끼던 시절도 있었다. 어찌 보면 예능의 역사란 재미의 선을 연장하기보다 확장하는 과정이다. 우리 앞엔 언제나 재미있는 것도 있지만 시대에 따라 맞는 재미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또 나왔다. ‘맞다’라는 단어다. 우리는 학교에서 시험 볼 때 두 가지 질문에 답해야 했다. ‘다음 중 맞는 것을 고르시오’와 ‘다음 중 옳은 것을 고르시오’다. 그때마다 자문한 게 있다. 무엇이 맞고 무엇이 옳은가. 맞는 옷은 있지만 옳은 옷은 없다. 사람들은 서로 자기, 자기편이 옳다고 우긴다. 옷을 고르러 가서 ‘이 옷은 옳지 않아’ ‘저런 옷을 입는 사람은 제정신인가’라고 말하진 않는다. 다만 내게 맞지 않을 뿐이다. ‘예능은 패션이다’라는 제목이 마음에 와닿는 이유다. 취향의 존중이 예능의 기본이다. 다양성이 사라지면 창의성도 맥을 못 춘다.

일찍이 쓰고 싶었던 책 제목 중에 ‘여의도 3국지’라는 게 있다. KBS, MBC, SBS가 모두 여의도에 있던 시절의 이야기다. 지금은 어떤가. KBS만 덩그러니 여의도에 남았다. 그리고 상암, 목동, 광화문 등지에서 수많은 채널이 시청자를 유혹한다. 이제 예능은 히스토리(歷史)이자 플랫폼(驛舍)이다. PD들은 방송뿐 아니라 유튜브, 넷플릭스 등과도 경쟁해야 한다. 바야흐로 콘텐츠 전쟁 시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건 살아남는다.

오래전 일화다. 방송을 가르치는 교수가 누군가의 소개로 나를 찾아왔다. 인사말이 묘했다. “저는 예능프로를 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능도 가르쳐야 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난감했지만 나는 친절하게 설명했고 그는 메모했다. 스튜디오와 편집실에서 즐거움이 그에게 스며들지 않는다는 게 눈에 확연히 보였지만 그에겐 내가 모르는 다른 즐거움이 많이 있을 거라고 나는 짐작했다.

좋은 것과 좋아하는 것은 다르다.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 그러나 우리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실제로 많지 않다. 그냥 좋은 것이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내면의 욕망과 지켜야 할 규정, 예절 사이에 인간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게 예능이다. 예능은 경계다. 그래서 아슬아슬, 조마조마하다. 예능을 오래 하다 보면 욕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해하게 된다. “사람이 그러면 안 되지”가 “나라면 절대 안 그래”보다 앞설 때 사람들은 욕을 하게 된다.

이 시리즈가 무한도전이 될지 무모한 도전이 될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예능PD를 경험한 사람으로서 이따금 나에게 질문한다. “네가 예능을 아느냐.” 이때 퍼뜩 생각나는 노랫말이 있다. “난 알아요. 이 밤이 흐르고 흐르면 누군가가 나를 떠나 버려야 한다는 그 사실을 그 이유를.” 나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이 노래가 인간의 이중성을 잘 드러냈다고 해석한다. 밤이 욕망의 시간이라면 아침은 희망의 시간이다. 그 경계에서 인간은 낡은 자신과 결별해야 한다. 거창하게 말하면 예능의 역사도 신채호 선생이 ‘조선상고사’에서 밝힌 것처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 감각적 자아와 규범적 자아, 본능적 자아와 사회적 자아 사이에서 예능은 진화하기도 하고 퇴화하기도 한다.

주철환 프로듀서 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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