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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태원의 메디컬 인사이드] 스리슬쩍 술 권하는 방통위


매주 금요일 밤 11시 넘어서 하는 TV프로그램 ‘나혼자 산다’는 중2인 아들의 최애 예능이다. 시청률조사기관 자료를 보니 우리 아이만 유별나게 좋아하는 건 아닌 듯하다. 청소년이 즐겨보는 지상파 10위권 예능 중 늘 상위에 올라 있다.

아이와 함께 프로그램을 보다 눈살이 찌푸려지거나 당혹스러울 때가 더러 있다. 출연자가 집에서 혼술하거나 혹은 지인들과 술판을 벌이는 장면이다. 싱글 라이프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관찰 예능의 특성을 감안하더라도 하고많은 삶의 모습 중에 굳이 음주 장면까지 보여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근래 본 해당 예능의 한 장면. 여성 진행자가 밤에 자기 집에서 맥주를 마시자 “퇴근 후엔 맥주가 진리” “맥주 한 캔으로 하루 마무리” 같은 자막이 뜨고 다른 출연자들이 “최고다, 최고”라고 맞장구친다. 한국건강증진개발원은 이를 ‘음주 미화’로 보고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심의를 요청했으나 제재 조치는 내려지지 않았다. 만일 아들 또래 아이들이 그 장면을 본다면 일 마치고 집에 가서는 의당 술 마시는 게 일상인 양 비칠 수 있는데도 말이다.

미디어 속 음주 장면을 자주 접할수록 술을 더 자주, 많이 마시게 된다는 점은 여러 연구를 통해 입증됐다. 청소년의 빠른 음주 시작과 높은 음주 빈도와도 관련 있다. 지난해 TV 드라마와 예능 한 편당 1건꼴로 이런 음주 장면이 등장했다.

앞으로 드라마와 예능에서 노골적인 음주 장면과 술 광고를 더 많이 접하게 될지 모르겠다. 방송통신위원회가 6월부터 심야 시간대 주류 제품의 가상·간접광고(PPL)를 허용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어서다. 국민건강증진법상 알코올 도수 17도 이상의 TV 술 광고는 할 수 없고 17도 미만의 경우 지금도 밤 10시부터 다음날 아침 7시까지는 가능하다. 다만 방송법으로 가상·간접광고는 그간 금지해 왔는데, 이를 풀겠다는 것이다.

지금도 청소년의 65%가 주류 광고에 노출돼 있고 12.6%는 노출 후 음주 충동을 느꼈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건강증진개발원 2017, 2020년 조사). 실상을 봐도 알 수 있다. 법망을 살짝 피해 간 17도 미만 저도주 광고가 브라운관을 점령하고 있다. 광고 등장 인물은 대부분 젊은 연예인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는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에서 특정 술 제품을 대놓고 선전하도록 허용하겠다는 것이다.

이대로 시행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지상파와 종합편성채널(종편), 케이블채널을 가리지 않고 인기 드라마 출연자들은 특정 상표의 술을 노골적으로 홍보하며 마시는 모습이 화면에 고스란히 드러날 것이다. 아예 프로그램 기획 단계에서 주류회사 도움으로 제작하고 해당사 제품으로 가득한 술집에서 출연자들이 환호하는 예능이 나오지 말란 법도 없다. 한마디로 술 PPL로 범벅된 드라마, 예능이 안방을 차지할 것이란 얘기다.

일반 광고와는 다르게 드라마나 예능 속 PPL은 청소년 등 젊은층에게 고민 있거나 힘들면 술을 마시라는 잘못된 인지를 줄 수 있다. PPL이 스리슬쩍 국민 손에 술을 들게 하는 꼴이다.

방통위는 원래 주류 방송 광고가 가능한 심야 시간대여서 큰 문제 없다는 입장이지만 밤 10시 넘어서도 아이들이 시청 가능한 프로그램이 많다. 건강증진개발원이 지난해 모니터링한 청소년 시청률 10위권 드라마 74편 중 29편, 예능 40편 중 15편이 밤 10시 이후에 전파를 탔다. 게다가 요즘은 재방송, 다시보기 서비스, 유튜브 등을 통해 시간대와 무관하게 볼 수 있어 PPL 허용 시 청소년 노출 가능성이 높다.

방송산업 육성을 명분으로 내세운 방통위가 이런 우려에 대해선 얼마나 깊이 고민했는지 묻고 싶다. 주류 광고 규제 강화를 추진하는 보건복지부의 정책 기조와도 엇박자다.

민태원 의학전문기자 twm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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