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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춘추] 고맙지 않은 세대

천지우 논설위원


고등학교 1학년 때 스승의 날 다음날 조회 시간, 담임선생이 굉장히 못마땅한 얼굴로 이런저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러다 갑자기 내 눈앞에 자기 얼굴을 바짝 들이대면서 큰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요즘 애들은 고마움을 몰라.”

너무나 어이없고 분노가 치민 순간이어서 저 말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선생은 스승의 날에 촌지가 충분히 들어오지 않아 몹시 언짢았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화풀이 잔소리를 하던 와중에 마침 아무것도 안 갖다 바친 녀석이 눈에 띄자 직설을 날린 것이다.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하는 선생에게 학생이 고마워할 일이 뭐가 있을까. 그는 교사로서 실력도 형편없었을뿐더러 윤리적으로 자격 미달이었다.

이 오래전 일이 떠오른 것은 지난 설 연휴 때 여당 서울시장 예비후보인 우상호 의원 캠프 상황실장이라는 박도은씨가 소셜미디어에 쓴 글 때문이다. 박씨는 우 의원이 박원순 전 서울시장 유족을 위로한 편지 때문에 비난받는 것을 도저히 못 참겠다면서 우 의원과 박 전 시장을 열심히 두둔했다. 박씨는 우 의원을 공격하던 이언주 국민의힘 부산시장 예비후보도 강하게 비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네가 함부로 깔 만한 그런 사람 아니야. 너랑 내가 이렇게 편히 사는 것도 그분들과 선배 세대들의 희생 때문이야. 너 똑똑해서 그런 거 아냐. 착각하지 마.”

이언주 예비후보를 겨냥한 말이었지만, 우 의원과 박 전 시장에 대해 비판적인 모든 이들에게 하는 말로 들렸다. ‘지금 이 좋은 세상에 사는 게 저분들의 거룩한 희생 덕분인데 너는 왜 그런 고마움을 모르느냐’는 말로 들려서 불쾌했다. 멀쩡히 월급 받으면서 촌지를 갈구하던 선생이 전혀 고맙지 않았던 것처럼 우 의원과 박 전 시장에게도 고마움의 감정을 가져본 적이 없다.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이력 등에 힘입어 유명 정치인이 되고 국회의원, 서울시장 몇 번 했으면 과거의 노고는 충분히 보상받은 것 아닌가? 이미 한참 전부터 상당한 권력을 누려온 이들에게 도대체 언제까지 고마워해야 한다는 건가. 과거를 우려먹는 일은 그만했으면 한다. 과거에 잘한 게 100이라도 지금 심각하게 잘못한 일 하나가 있으면 그것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성범죄를 저지른 권력자를 두둔하는 행태는 퇴행적이고 비윤리적이다.

우 의원을 비롯한 86세대는 정치권뿐 아니라 사회 각 분야에서 권력을 장악했다. 민주화 투쟁을 한 것에 대한 보상을 이미 받은 셈이다. 이제는 그들이 권력을 너무 오래 독점하는 게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이철승 서강대 교수가 2년 전 펴낸 ‘불평등의 세대’가 그런 내용이다. 이 교수에 따르면 86세대의 선두주자들은 2000년대 중반부터 기업과 정당의 수뇌부로 부상했다. 규모와 응집성 면에서 다른 모든 세대를 압도하는 86세대는 한국 현대사에서 유례없이 견고한 인적 네트워크를 건설했다. 그럼 지금 그들은 젊은 시절 꿈꿨던 세상을 만들어냈나? 보다시피 아니다. 공정과 정의를 부르짖었지만 외려 불공정과 불평등이 심해졌다. 여기에 비효율까지 더해진다. 이 교수는 86세대가 이사 자리를 독식하고 있는 기업들이 세대교체를 이룬 기업들보다 성과가 낮음을 통계로 보여줬다.

노자는 “족함을 알아야 욕됨이 없고, 멈출 줄 알아야 위태롭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86세대는 만족을 모르는 것 같다. 쥐고 있는 걸 다음 세대를 위해 놓으려 하지 않는다. 이런 식이면 욕되고 위태로울 게 분명하다.

브라질 영화 ‘중앙역’(1998)의 주인공 도라는 노년에 가까운, 혼자 사는 여성이다. 심보가 고약하고 이기적인 인물이다. 교사였던 그는 리우데자네이루 중앙역에서 글 모르는 사람들의 편지를 대신 써주고 돈을 받는다. 대필한 편지들을 매일 집에 가져와 읽으면서 실컷 비웃고는 한 통도 부치지 않는다. 무식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등쳐먹는 삶이다. 역에서 만난 소년 조슈에가 그의 거짓과 위선을 간파하고 추궁하자 도라는 부끄러워서인지 화를 펄펄 낸다. 두 사람은 어떤 계기로 먼 길을 동행하는데 여행길에서 계속 반목하다 서로를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결국 각성한 도라는 조슈에한테 최선인 상황을 만들어주고 조용히 물러난다. 오랜만에 정신 차리고 좋은 일을 한 것이다. 해피엔딩이다. 지금 한국에서 가장 탐욕적인 세대도 다음 세대를 위해 간만에 좋은 일 한번 해줬으면 좋겠다. 조용히 물러나는 일 말이다.

천지우 논설위원 mogu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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