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오피니언 > 칼럼 > 논단(국민논단)

[국민논단] 발상의 전환 필요한 기획재정부

이제민 연세대 명예교수


경제학자 케인스(1883∼1946)는 말을 잘 바꾼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조건이 바뀌면 저는 결론을 수정한답니다. 귀하는 어떻게 하시는데요?” 당시 가장 크게 달라진 조건은 1929년 대공황 발발이다. 케인스는 대다수 학자나 공무원이 과거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고정관념의 핵심은 총수요가 만성적으로 부족한 상태에서 확장적 재정정책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 후 조건은 다시 바뀌었다. 2차대전 후 장기 호황이 전개되면서 재정정책을 써야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오히려 늘어난 복지 지출 때문에 재정건전성이 중요 과제가 됐다. 그런 사정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또다시 바뀌었다. 위기 대응은 물론 뒤이은 대침체로부터 빠져나오는 데 재정정책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거기에 작년 코로나19 위기가 겹쳤다.

한국은 원래 총수요가 아니라 공급 능력이 부족한 경제였다. 공급 능력을 급속히 늘린 것이 고도성장이다. 고도성장은 적은 복지 지출과 균형재정 위에서 이뤄졌다. 그러나 한국이 재정정책을 쓰지 않은 것은 아니다. 고도성장기에도 단기적 경기 부양을 위해 재정정책을 썼다. 재정이 결정적 역할을 한 건 1997년 외환위기 때다. 정부는 공적자금 조성에만 국내총생산(GDP)의 25%를 투입했다. 뒤이어 2008년 위기 때 경기 부양을 해야 했고, 2013년부터는 총수요 부족으로 디플레이션 위협에 직면함에 따라 재정정책을 써야 하는 사정이 됐다. 여기에 코로나 위기가 더해진 것이다.

조건이 바뀌면 정책도 달라져야 한다는 점에서 과거 한국 정부는 잘했다. 그렇게 해서 고도성장도 하고 외환위기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예산권을 쥔 기획재정부를 중심으로 그런 모습이 사라졌다. 그것은 코로나 사태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기재부는 소극적·방어적 자세로 일관했다. 지방정부가 발 빠르게 움직이는 가운데 시기를 놓치기도 하고, 피해 지원을 선별적으로 해야 한다는 입장도 재원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한 것인지 그 투입 자체를 줄이기 위한 것인지 불분명했다. 그런 모습은 위기 발발 후 1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위기 대응에 돈을 아끼는 것은 결국 돈이 더 드는 결과로 이어진다. 방역 성공이 바로 경제 회복 지름길이고 방역 협조를 얻는 데 재정 지원이 필요한 만큼 적기에 재정을 과감하게 투입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돈을 아끼는 길이다.

물론 기재부가 그렇게 행동한 데는 이유가 있다. 외환위기 후 재정건전성이 악화됐기 때문이다.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1997년 11.4%에서 2019년 37.7%로 올라갔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위기에 대처한 것이 주원인이 아니다. 위기 대처에 쓰는 재원은 한시적인 것이다. 그것이 국가채무 비율에 주는 영향은 성장률이 이자율보다 높은 상황에선 시간이 가면서 줄어든다. 그래서 1997년 위기 때 투입한 공적자금의 결과도 지금 GDP의 3∼4% 선에서 관리되고 있다.

외환위기 후 국가채무 비율이 올라간 주원인은 늘어난 복지 지출을 일반회계에서 보전한 때문이다. 20여년 동안 17% 포인트 정도 올라갔으니 가파른 상승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복지 지출이 지속적 지출이라는 점에서 문제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이 당장 코로나 위기와 싸우는 데서 소극적·방어적 태도를 취할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기재부 공무원은 한국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다. 같은 엘리트라도 가진 능력을 ‘지대추구’에 써서 성공한 뒤 권력을 휘두르는 집단과 다르다. 나라 전체의 관점으로 문제를 보면서 많은 학습과 경험을 쌓고 국제적 감각도 갖추고 있다. 일에 대한 열정도 남달라서 이번 위기에도 작년에 네 번씩이나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하는 헌신적 노력을 했고 그런 사정은 올해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재정건전성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나온 소극적·방어적 자세는 그런 노력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지금 기재부에 필요한 것은 선도적·적극적으로 위기에 대응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나중에 재정건전성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때 그것을 선도할 수 있는 신뢰도 얻을 수 있다. 케인스는 당시 영국 재무부 공무원들이 적극적 역할을 함으로써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한국의 기재부 공무원들은 그 사람들과 달랐으면 좋겠다.

이제민 연세대 명예교수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국민일보 신문구독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