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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태의 지금 유럽은] 지구촌 갈수록 블록화 가속… 외국어 능력이 경쟁력

국제 경쟁과 의사소통 능력

유럽연합(EU)은 모든 EU 국적자가 모국어 외에 2개의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사진은 찰스 미셸 유럽이사회 의장(화면 왼쪽 상단)이 지난달 25일 브뤼셀에 있는 유럽 이사회 건물에서 화상을 통해 EU 정상들과 회의를 진행하고 있는 모습. AP 뉴시스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가 가입해 있는 유엔의 공식 언어는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아랍어, 중국어, 러시아어다. 37개 국가가 속해 있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공식 언어는 영어와 프랑스어다. 그렇다면 27개 회원국을 가지고 있는 유럽연합(EU)의 공식 언어는 무엇일까. 정답은 회원국들이 공식 언어로 채택하고 있는 모든 언어로, 그 수가 무려 24개에 이른다. EU 국적자는 EU의 공식적 기관을 접촉할 경우 누구나 자신의 모국어로 의사 표시를 할 수 있으며, EU 측도 그 당사자의 모국어로 회신해야 한다. 그리고 EU는 모든 EU 국적자가 모국어 외에 2개의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도 가지고 있다.

이처럼 EU가 언어적 다양성에 대해 많은 가치를 부여하다 보니 부작용도 나타난다. 한 예로, 유럽이사회(European Council) 또는 유럽의회(European Parliament)의 모든 회의가 24개 언어로 통역되며, 이로 인해 엄청난 행정적 비용이 발생한다. 사용 인구가 300만명도 되지 않는 라트비아어, 리투아니아어, 심지어 사용 인구가 50만명 정도에 불과한 몰타어도 영어나 프랑스어와 동등한 지위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장차 알바니아, 터키 등 현재 EU 가입을 추진하고 있는 나라들의 언어가 공식 언어로 추가될 경우 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질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공식 언어에도 불구하고 유럽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어는 역시 영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2020년 1월 영국이 EU를 떠났지만 영어는 EU의 공식 언어로 남아 있다. 표면적으로는 영어가 EU 회원국인 아일랜드와 몰타의 공식 언어 중 하나이기 때문에 그 지위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긴 하지만 아일랜드어와 몰타어도 영어와는 별개로 EU의 공식 언어라는 점을 감안하면 영국은 떠났어도 그 흔적은 계속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유럽 대륙을 언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영어와 무관한 나라가 대부분이다. 우선 프랑스, 스위스, 벨기에, 룩셈부르크는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이탈리아와 스페인은 언어 구조상 프랑스어를 쉽게 습득할 수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이들 나라를 범 불어(佛語)권이라 해도 될 것이다. 그리고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는 독일어를 사용하며 과거 소비에트 블록에 속했던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불가리아 등지에서는 상당히 많은 사람이 아직도 러시아어를 구사하고 있다. 하지만 유럽인들이 서로 만났을 때 말이 통하지 않을 경우에는 우선 영어로 의사소통을 시도해 보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EU의 야심 찬 계획처럼 EU 국적자들이 자국어 외에 두 가지 언어를 더 구사할 수 있게 된다면 영어는 이 가운데 반드시 포함될 것이다.

세계가 점점 복잡하게 얽히고, 공동 번영을 위해 블록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글로벌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바로 언어 능력이다. 언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이며, 문화와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도구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처럼 자원도 부족하고 지리적으로 고립돼 있는 나라는 글로벌 비즈니스를 통해 발전을 도모해야 하는데 외국어 능력이 전반적으로 떨어질 경우 해외 무대 경쟁력은 필연적으로 낮아질 수밖에 없다.

현재 우리 기업들이 해외 시장에서 많은 활약을 펼치고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 경제가 꾸준히 성장하고 있지만, 아직 우리나라는 교육을 포함한 많은 분야가 글로벌 시스템과 단절돼 있다. 좁은 땅덩어리에서 작은 파이를 놓고 수많은 사람이 경쟁하고 있다. 사실 우리 국민의 지적 수준이 세계적 기준으로 볼 때 상당히 높은 편이라는 점을 인식한다면 이렇게 소모전에 몰두할 것이 아니라 더 좋은 기회를 만들기 위해 고민을 하는 게 자신과 국가를 위해 모두 좋은 일일 것이다. 머리 좋고 성실한 사람이 글로벌 비전과 외국어 능력을 추가적으로 갖춘다면 그 사람에게는 우리의 좁은 땅이 더 이상 좁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다양한 민족이 뒤섞여 살던 유럽이 20세기 들어 하나로 통합될 수 있었던 것은 함께 뭉쳐서 더 큰 힘을 발휘하겠다는 공통적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이웃과 친하게 지낸다는 것을 넘어 화폐까지 통합해 가며 한 살림을 차리게 된 것은 공동 번영을 위해서였다. 우선은 경제적 측면에 초점이 맞춰졌고 이에 따라 상품과 인력의 자유로운 이동이 보장됐다. 그러나 시스템이 통합돼도 마지막까지 쉽게 벽을 허물 수 없는 것이 바로 언어와 관습인데, 이제 유럽은 정체성의 공유를 실현한다는 차원에서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언어를 공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지구 저편에서 이런 노력이 진행되는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급격히 다가온 경제적 번영 속에서 현실을 즐기거나 정쟁에 지나치게 많은 힘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래전 프로야구 경기에서 해설자가 “오늘 투수의 공이 매우 좋은데, 투수는 공이 좋을 때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지금도 이 말이 잊히지 않는다. 외교관만 외국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 국민 누구나 글로벌 비전을 가지고 해외로 진출하고자 한다면 이를 지원하고 인도해줄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할 시점이다. 이런 시스템 속에는 외국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부분도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

갈수록 글로벌 경쟁이 심화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남들은 미래를 바라보며 빠른 속도로 달리는데 우리는 더 크게, 더 멀리 보지 못하고 있다면 방심하는 사이에 남들보다 뒤처질 수 있다. 특히 우리는 EU처럼 같은 배를 타고 항해에 나서는 이웃도 없고, 긴장감 넘치는 지정학적 미로 속에서 국제정치적 영향도 많이 받는, 어떻게 보면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에 더욱 체계적으로 그리고 전략적으로 미래를 준비할 필요가 있다.

OECD 국제교통포럼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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