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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사니] 모두의 실버 라이닝

임세정 국제부 기자


“여행을 떠나온 지 얼마나 되었을까. 매일 아침 잠에서 깰 때면 여긴 어디인가 누워서 생각해. 그리고 아침을 먹으러 가네. (중략) 이리저리 거리를 헤매다 문득 궁금해져. 나는 나의 길을 가는가, 내 꿈은 무엇이었나. 여행이 끝나고 나면 텅 빈 배낭 가득 찬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갈래.”

가수 하림이 만든 ‘배낭여행자의 노래’는 여전히 내 플레이리스트 속에 있다. 다만 언제부턴가 이 노래가 고대 가요처럼 들리기는 했다. 그토록 공감했던 노래 가사가 어느 순간 아득하게 느껴져서다. 바지런한 주인을 만나 쉴 틈을 찾기 힘들었던 여권은 2020년 1월의 여정이 찍힌 항공권을 품에 안고 14개월째 서랍 안에서 밀린 잠을 자고 있다.

천고만난이 무한히도 반복되는 현실을 떠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었던 시간. 낯선 세계와 부딪치며 겸손해질 수 있었던 시간. 시계를 쳐다보지 않고 여유로운 아침 식사를 즐길 수 있었던 시간. 여행자에게 베푸는 너그러움을 누릴 수 있었던 시간. 그렇다. 솔직히 관광이든 도피든, 떠나고 싶다. 살면서 중요한 건 여행을 통해 배웠다고 생각하는 편이어서 동행이 있든 없든 훌쩍 떠나는 데는 줄곧 용감했다. 하지만 팬데믹 이후론 한 시간 남짓 국내선 비행은커녕 기차 여행조차 하지 않았다. 감염될 것도, 감염시킬 수 있다는 것도 두려웠던 탓이다. 그래도 가끔은 대탈출의 그날을 기다리며 목적지를 손꼽아보곤 했다.

무착륙 여행 상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호응은 향후 여행 수요를 짐작케 한다. 호주 콴타스항공은 착륙 없이 남극 상공을 비행하는 상품을 판매했다. 일본 ANA항공은 후지산 인근을 한 바퀴 돌며 일출을 보는 상품을 출시해 매진 기록을 세웠다.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등은 이달에도 동해안과 부산, 제주 등의 상공을 비행만 하고 돌아오는 관광 비행을 진행한다.

미국에선 코로나19 백신 우선 접종 대상인 65세 이상 인구가 여행업계의 새로운 ‘큰손’으로 떠오르고 있다. CNN방송은 “자녀나 손주들은 백신을 맞으려면 몇 달을 더 기다려야 하지만 은발의 그들은 한 줄기 빛을 보고 있다(For the silver-haired, it’s a silver lining)”고 전했다. 여행에 대한 갈증은 만국 공통인 듯하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단계적인 사회적 거리두기 완화 계획을 발표한 지난주 영국인들의 주요 대화 주제 중 하나는 “이제 올해 휴가를 예약해야 할까?”였다고 일간 가디언은 지난 27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여행에도 ‘뉴 노멀’은 적용될 것이다. 지난 한 해 유례 없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항공·여행업계는 기대감 속에 재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국제항공운송협회(IATA)는 코로나19 검사 결과와 백신 접종 기록 등 건강 증명이 담긴 글로벌 기준인 디지털 여행 패스를 도입할 계획을 지난달 발표했다. 에티하드항공과 싱가포르항공은 승무원 전원이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마쳤다고 밝혔다.

과정이 어찌 됐든 사람들은 떠나기 시작할 것이다. 더 안전한 여행에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한동안 마스크를 쓴 채 여행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감염 불안감과 방역 피로도 등 그간의 팬데믹 스트레스도 여행 수요 증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보상 여행’인 셈이다.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에 거주하는 짐 드레이어(69)는 아내 셰릴과 함께 지난달 초 백신 2회차 접종을 마쳤고, 곧 하와이로 떠난다. 드레이어는 “우리는 지난 1년간 마스크 착용과 사회적 거리두기 등을 잘 지켜왔다. 외식도 한 번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국내에서도 백신 접종이 시작됐다. 우리도 머지않아 백신 여권을 손에 들고 어디론가 향하게 될 테다. 가까스로 얻은 기회를 다시 잃지 않으려면 여행 중에도 방역 의식은 강조돼야 할 거다. 그래도 이제 곧 떠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은발의 어르신뿐만 아니라 코로나19를 견뎌 온 모든 세대에게 먹구름 속 한 줄기 빛 ‘실버 라이닝’ 아닐까.

임세정 국제부 기자 fish813@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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