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상·처벌로 업무 스트레스 근절 안돼… “일하는 환경 바꿔야” [이슈&탐사]

[일이 부른 마음의 병] <⑤·끝> 예방하려면

한 직장인이 지난 17일 서울 강서구 서울서부근로자건강센터에서 상담을 받고 있다. 센터는 직무 스트레스 등에 의한 직장인의 정신질환을 예방하기 위해 설치됐다. 윤성호 기자

“콜센터 상담원이 고객 폭언 때문에 힘들다고 생각하시죠? 근데 그분들은 ‘그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해요. 진짜 힘든 이유는 다른 데 있다는 거죠.”

지난 17일 서울 강서구 서울서부근로자건강센터(서부건강센터)에서 만난 임지영 심리상담사가 말했다. 그가 속한 서부건강센터는 2015년부터 2018년까지 4년간 한 공공기관 콜센터 조직의 직무 스트레스 예방·관리 심리지원에 나섰다. 콜센터 업무를 위탁받은 업체의 대표는 상담원들의 스트레스 요인을 ‘고객’이라고 보고 심리지원을 요청했다.

심리상담사가 만난 콜센터 상담원들의 말은 결이 달랐다. 고객 문제가 있긴 했지만 대부분 “악성 민원은 지나가 버리는 일”이라고 했다. 노동자들은 감정노동에 따른 스트레스를 어느 정도 불가피한 일로 받아들이고 있던 셈이다.

정작 상담원들을 힘들게 한 건 고객 불만을 키우는 업무 환경이었다. 부서마다 다른 정보를 제공하면 고객의 폭언이 심해졌다. 노후화된 ARS로 갑자기 전화 연결이 끊어지면 상담원이 화풀이 대상이 됐다. 상담원들은 휴식 없이 장시간 감정노동을 이어가는 점, 악성 고객 응대 후 안정을 취할 시간과 공간이 없는 점도 문제라고 토로했다.

서부건강센터는 업체에 조직 차원의 변화를 권고했다. ARS 시스템을 정비하고 악성 민원 상담 후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할 것을 제안했다. 또 폭언·성희롱뿐만 아니라 부당한 요구를 장시간 반복하는 민원, 협박·인격모독을 받을 경우 상담원이 통화를 끊을 수 있게 조치했다.

그러자 상담원들의 직무 스트레스가 2015년 6.9점에서 2017년 3.5점으로 낮아졌다. 업무 환경에 따라 직무 스트레스가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사례였다. 임지영 심리상담사는 “직무 스트레스나 감정노동에 따른 정신질환을 예방하려면 직원들이 왜 스트레스를 받는지 현장에서 반복해 조사하고 분석해 업무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예방이 어려운 이유

그동안 ‘노동자의 건강’은 사고로 인한 부상과 사망에 초점이 맞춰졌다. 정신질환으로 점차 확대된 건 최근의 현상이다. 사무직이 늘어나고 서비스업, 보건업 등 종사자가 많아지면서 직무 스트레스, 감정노동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새로운 고용형태의 등장과 작업방식의 변화는 정신질환 문제에 대한 개입 필요성을 높인다. 자살 등 정신질환 산재도 늘어나는 추세다. 정신질환 산재승인율은 2013년 33.6%(122건 중 41건)에서 2019년 69.2%(325건 중 225건)로 2배 이상 늘었다.

그렇지만 노동자 정신 건강을 위한 제도와 장치는 매우 부족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강충원 서부건강센터 센터장은 “콜센터 사례는 이상적인 사례”라면서 “현실에서는 정신건강 관리가 안 되는 경우가 더 많다”고 말했다. 그는 “독일이나 일본은 시스템 내에서 정신건강 문제를 강조하고 평가·관리하는데 한국은 전통적 재해 관리도 잘 안 되고 있다”며 “그나마 산재는 이슈가 되지만 예방 분야에서는 고민이 구체화하지 못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지난 17일 서울 강서구 서울서부근로자건강센터 관계자가 센터로 들어가고 있다. 윤성호 기자

기업의 일하는 방식이 달라진 산업 환경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도 이유다. 김세은 이대서울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교수는 “업무 관련 정신질환은 회사의 구조적인 문제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노동자의 자살 및 정신질환 문제를 예방하기 어려운 배경에는 ‘노동’과 ‘정신질환’을 함께 다뤄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김인아 한양대 의대 직업환경의학교실 교수는 “고용노동부는 전통적 노사관계에 근거해 화학물질이나 사고를 주로 다루다 보니 정신건강 관련 경험이 별로 없다”며 “고용부의 노동 조건을 담당하는 ‘고용’ 부문과 보건을 신경 쓰는 ‘산업안전보건’ 부문 그리고 복지부의 ‘정신건강’ 부문 이 세 부분이 함께 있어야 예방까지 나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근로자 정신건강 보호를 위한 조치는 확대되는 추세다. 산업안전보건법은 ‘근로자의 신체·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한 건강장해를 예방’(5조)하고 ‘직무 스트레스로 인한 건강장해 예방 조치’(669조)를 할 사업주의 의무를 명시한다. 2018년 10월부터는 ‘고객 응대 근로자의 신체·정신적 고통으로 인한 건강장해 예방, 고객과 문제 발생 시, 근로자가 업무중단 및 전환하도록 조치’하게 했다. 2019년 7월부터는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이 시행됐다.

다만 실효성이 문제다. 임지영 심리상담사는 “산업안전보건법이나 근로기준법에 필요한 조치가 언급돼 있지만 강제 조항이 아니어서 사업주를 설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김인아 교수는 “직무 스트레스를 주기적으로 평가하도록 하거나 교대근무 가이드를 만들어 제공했지만 한계가 있다”며 “노동자의 정신건강 문제 해결과 예방은 정부가 단호한 의지를 갖고 추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최근 국회를 통과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에도 노동자의 자살 등 업무상 정신질환이 명확하게 포함되지 않았다. 이 법은 안전사고로 노동자가 사망할 경우 사업주·경영책임자에게 1년 이상의 징역이나 10억원 이하의 벌금(법인에는 50억원 이하)을 부과할 수 있도록 했다. 최민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직업환경전문의는 “자살은 질병이어서 노동계는 질병과 사고를 구분 말고 중대재해의 정의에 넣자고 했지만 어떤 질병을 넣을지 대통령령으로 미뤄둔 상황”이라고 말했다. 참여연대는 지난달 8일 성명에서 “사고가 아닌 질병 사망도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의 대상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참여연대는 “일터 괴롭힘으로 인한 자살과 정신질환, 과로로 인한 사망과 뇌심혈관질환, 만성중독으로 인한 암과 희소질환 발생 역시 모두 산업재해이고 사업주의 보건조치로 막을 수 있는 비극”이라고 밝혔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

전문가들은 노동자의 자살과 정신질환을 예방하려면 조직 시스템 전반을 살펴봐야 한다고 말한다. 김인아 교수는 “겉으로는 ‘직장 내 괴롭힘’이지만 그 밑바탕에는 조직과 업무의 특성, 인력 문제, 업무분장 등 선행 문제가 있을 수 있다”며 “이를 그대로 두고 리더십·커뮤니케이션 교육만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정신질환을 예방하려면 단순히 처벌에 그치지 않고 노동조직에 개입해 노사관계, 인사·노무 시스템 등에 관여해야 하며 사업주를 교육해야 한다”며 “한국 사회에서는 한 번도 안 해보지 않은 일이니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김형렬 가톨릭대 직업환경의학과 교수는 “업무 소외, 과도한 업무와 낮은 보상 등으로 (노동자들이)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며 “조직 내 정신건강 문제를 다룰 때는 사업주가 ‘조직 내 민주주의가 잘 실현되는지’ 챙기는 게 중요하다는 인식을 갖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 후생노동성은 2015년 ‘근로자의 정신건강 유지 증진을 위한 지침’을 개정하면서 조직적 접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근로자가 직장 내 스트레스 요인을 제거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사업주가 직장환경 개선과 근로자 정신건강 관리를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법과 제도의 뒷받침도 필요하다. 독일은 2013년 사회심리적 위험을 산업안전보건법에 명시했다. ‘사회심리적 위험’은 직무 스트레스, 직장 내 괴롭힘, 감정노동 등으로 생기는 작업장 문제를 포함한다. 일본은 2015년 12월부터 근로자의 ‘스트레스 체크’ 제도를 의무화했다.

한편 고용부는 지난해 5월 ‘제5차 산재 예방 5개년 계획’에서 ‘직장 내 괴롭힘, 감정노동, 트라우마 등 정신건강 보호 확대’ 방안을 내놓았다. 정신적 스트레스 개념에 직장 내 괴롭힘, 고객의 폭언·폭행, 직업적 트라우마 등을 포함하도록 법령 개정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또 노동자 정신건강 수준을 진단하고 예측할 수 있는 지표(이직률, 회사 지원프로그램, 흡연율 등)와 조직적 예방관리 프로그램을 개발하기로 했다. 관리감독자, 안전·보건관리자 등을 대상으로 한 ‘자살 예방 게이트키퍼’(가족·친구 등 주변 사람의 자살위험 신호를 인지해 전문가에게 연계하도록 훈련받은 사람) 교육 등도 포함됐다.

현장에서는 심리상담사에 대한 지원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임지영 심리상담사는 “근로자 정신건강 지원 체계가 양적으로는 확실히 늘어나고 있다”면서도 “위탁구조로 인한 고용불안, 낮은 처우 등으로 상담사들이 이탈하면서 근로자 정신건강 상담 경험을 축적하기 어려운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슈&탐사2팀 권기석 김유나 권중혁 방극렬 기자 green@kmib.co.kr

[일이 부른 마음의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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